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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Apr 19. 2023

산책길에 만난 봄꽃

어르신들 핸드폰을 보면 유독 꽃 사진이 많았는데, 어렸을때는 그 부분을 의아해 했었다. 부모님의 필름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어 나도 모르는 이런 저런 사진을 찍히던 시절을 지나서 대학생이 될 무렵 디지털 카메라가 유행하기 시작했고, 집안에서 전자제품을 주로 담당하고 있던 내가 자연스럽게 내가 이 비싸고 소중한 물건을 차지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찍었던 사진은 지금의 아내 - 당시의 여자친구의 모습이었다. 그 후로 차곡 차곡 메모리 카드 안에는 여러 사진들이 쌓였다. 한동안은 내 모습을 많이 찍었다. 이렇게 저렇게 각도를 바꿔가며. 그리고 친구들의 사진이 많았다. 어깨동무를 하고 당장이라도 무너질것 같은 위태로운 인의 장벽을 만들고서는 가장 끝에 사람이 번갈아 가면서 찍어야 했기에, 다른 그림 찾기 처럼 같은 사진이 한 사람만 바뀌며 여러장 반복되었다. 그 후에는 아이들 사진이다. 솜털이 보송 보송한 아기가 기저귀로 빵빵한 바지를 입고 기어다니더니. 아기띠에 메달려 꾸벅 꾸벅 졸거나, 냅다 이유없이 울던 아이들이 이젠 앞머리를 잔뜩 내려 눈 만 빼꼼하게 내밀고 게임 동영상을 보는 요즘이다. 사진속의 그 모습은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한동안은 여행이 많았다. 새로운 나라에서 이국적인 건물과 풍경을 배경으로. 못 먹고, 돈 쓰고, 아옹 다옹 오고 가며 분명히 티격태격 했던것 같은데, 사진속의 하늘은 늘 쨍하니 맑고 푸르다. 그러다 이제 내 핸드폰에도 꽃 사진이 늘어간다.


점심을 먹고 나면 늘 회사 근처의 동네를 한바퀴 돌고 있다. 스마트워치 덕분에 내가 매번 도는 코스가  2.3km 정도가 되고, 시간은 25분 정도 소요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코스를 매일 돌다보니 계절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봄이 안 오고 날씨가 흐리다고 투덜 거렸었는데, 어느새 꽃들이 피고 있다. 산들 산들 바람에 흔들리는 꽃, 바람속에 흩날리는 꽃 바람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몽글 몽글해 진다.


벌써 4월인데, 벌써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 내가 피워낸것은 무엇일까.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며,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싱그러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저 꽃과 나무들은 그냥 서 있는것 만으로 근처를 지나가는 나에게 행복감을 안겨주는데, 내가 만들어낸 것은 무엇일까. 다음주에 있을 경영진 보고를 위해 아침부터 사내 메신저를 붙잡고, 자료를 만들어 달라고 채근하고, 이곳 저곳에서 퍼즐처럼 모아낸 숫자들을 누덕 누덕 기워서 의미 있어 보이는 엑셀을 만들어 내고는 있는데, 그래서 뭔가 줄어만 가던 통장이 아슬 아슬하게 다시 채워지고는 있는데, 과연 내가 이 땅 가운데 만들어 내고 있는건 얼마만큼 아름다운 것인가. 어제는 직원들이 모여 회식을 하며, 몇 시간을 이야기를 하고, 수백 유로를 먹어 치웠는데 나에게 들어가는 이 많은 자원들이 나를 통해서 어떤 아름다운 것들로 피어나는지. 나라는 씨앗은 근본적으로 이런 꽃을 피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는 있는 것인지, 살아서  그 단계로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이미 나도 모르게 시절을 놓치고 서서히 말라가고 있는 것인지. 그래서 꽃들이 대견하다. 온통 어려운 것들 뿐인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결국 금방 사라질 것들인데, 어쩜 이리도 최선을 다해서 꿋꿋하게 피어나는지. 옛날 내가 봤던 그 어르신들도 이 아이들이 대견해서, 그 노력을 기리고, 조금이라도 본 받기 위해서 주머니속에 남겨 놓으셨던건 아닐까.


어떤 꽃은 앙상한 나무에 먼저 피고, 다음에 잎이 난다. 봄 햇살이 찾아오자 마자 빼꼼히 머리를 내밀고, 그 햇살을 다 받아가는 풀도 있고, 한 여름 뙤약볕이 한달은 쬐어야 비로소 돋아나는 녀석도 있다. 노란 꽃이 확 피었다가, 바람에 흩날리는 씨앗이 되어 사라지나 싶더니, 그 같은 자리에 또 다음 순번이 찾아 온다. 모두에게 순서가 있고, 그 모습과 향기는 다르더라도 나름의 피어남이 있다.

나에게도 그 순서가 찾아오기를. 이미 좀 늦었지만, 그래도 이 속 어딘가에 숨겨진 생명이 움터서 언젠가 그 계절이 오면, 나도 한번은 피어날 수 있기를. 내 옆에 혹시 피어나는 작은 꽃을 실수로라도 상처입히지 않기를. 혹시 내가 피어나지 못하더라도 내 곁에 깃든 작은 생명들에게 그늘이라도 되어 줄 수 있기를. 나의 말과 행동이 나쁜 감정들로 악취를 내뿜으며 상처주지 않기를.


이룬것 없이 하루 하루 한달 한달 지나가는 건 좀 허무하고 쓸쓸한데, 산책 코스에 등장할 다음 순서는 누구일까는 기대된다. 올해는 한번 계절별로 남겨봐야 겠다. 그 대견한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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