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잘 참는 것이 미덕이었다. 몸이 아파도 참고, 속이 상해도 참고,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참는 것이 보통이었다. 무언가 일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이 상황은 내가 참아야 하는 상황일까 아닐까. 뇌리에 스쳐가는 여러 사례들이 떠오른다.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심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꾹 참았던 누군가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과 아픔을 지긋이 누른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누군가가 기어코 화를 내게 되면, 그렇게 격렬하고 뜨거운가 보다. 그간의 서러웠던 응축된 마음의 한이 터져 나오는 것인지, 한번 폭발한 화는 쉽사리 잦아들지 않는다. 처음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오죽이나 그랬을까 공감하고 동조하게 되지만, 시간이 더 흐르면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 알긴 알겠는데, 다들 그렇게 사는거 아니야? 누구는 멀쩡한 사람이 있나?
새로운 업무가 생겨서 팀을 구성하게 되면 보통 몇 명으로 구성해야 할지 관리자들과 이견이 생기게 된다. 보통 새로운 팀의 리더는 충분한 인력을 배정받기를 원하고, 회사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시작하기를 원한다. 우리가 하는 일에 앞서서, 그냥 살아가다 보면 여러가지 일들이 생긴다. 아프기도 하고, 우환이 생기기도 하고, 일하기에 어려운 상황은 반드시 발생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재의 사유는 대부분 미리 고려되지 않는다. 애초에 그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기본적인 자리를 만들기가 어렵고, 겨우 그 자리를 만들고 나면 채우는 것은 더욱 힘들다. 늘 두세 자리는 비어있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면 참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나의 부재는 결국 우리 팀의 부담과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부재의 사유 – 그것이 아픔이던, 슬픔이던, 우환이던 –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나의 짐이 되고, 인생을 향한 연민은 사라지고, 짜증이 난다.
하지만 부재의 사유는 불현듯 찾아온다. 때로는 눈에 보이는 상처나, 육체의 고통으로 온다. 어떤때는 마음의 아픔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아무런 이유가 없이, 갑자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때도 있다. 모든것이 귀찮고, 의미 없어 보이고, 보람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때도 오고,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때도 온다. 어쨌든 결론은 잠시라도 자리를 비워야 하는 건데, 이건 도무지 비울수가 없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수시로 자리를 비운다. 갑자기 병가를 내고, 진단서를 보내오더니, 몇주째 보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메일을 보내면 담당자가 자리에 없다는 메세지를 받기도 한다. 몇주씩 휴가를 다녀오기도 한다. 저녁과 주말은 개인과 가족의 시간이라 업무가 도무지 침범할 틈이 없다. 당장 답변을 얻고 업무를 진행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속이 터질때가 많지만, 이곳의 사회는 참지 않고, 부재를 용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다들 잘 살아가는것 같다. 애초에 타인의 부재를 염두에 두고 계획된 것 같은 곳이다. 부재한다고 해도, 늦어진다고 해도 아무일도 없다. 기업과 사회의 매커니즘이 개인의 고통과 인내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 뭔가 더 단단한 무언가에 기초하고 있고, 이곳의 구성원은 필요할때 부재할 수 있고, 타인의 부재에 담담할 수 있다. 도대체 그 원동력이 무엇일까 나름대로 고민해보고는 있지만, 아무리 찾아도 특별한 것은 보이질 않는다. 특별한 것이 아닌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보이지 않는것일 수도 있다.
다행히 지금의 나에게는 부재의 사유가 없다. 일하기 싫은 때가 수시로 찾아오나, 그것은 나의 의지의 문제일뿐 근본적인 능력과 상황과는 무관한 것이어서, 그래도 내 옆자리의 동료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나에게 맡겨진바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늘 생각하곤 한다. 내가 부재할 수 밖에 없는 시간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까? 불현듯 찾아올 그 시간에 나의 부재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로 남겨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