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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을 지날 때마다

by 봉수니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여름의 끝자락, 무더위가 한풀 꺾이던 날이었다.

바람은 선선했고, 햇볕은 부드럽게 땅을 어루만졌다.

계절이 바뀌는 기운이 느껴질 때면 괜히 마음도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곤 했는데, 그날이 딱 그랬다.


우리는 평소처럼 집 뒤편 산책로를 걸었다.

손을 잡지도, 팔짱을 끼지도 않았지만, 늘 그래왔던 것처럼 나란히 걸었다.


길가엔 무성한 갈대들이 가림막 안에서 키를 맞춰 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자 갈대들은 가늘게 흔들리며 조용히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때, 문득 낯설지 않은 기시감이 나를 덮쳤다.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대신 마음속에 떠오른 질문 하나를 꺼냈다.


"만약 우리가 헤어지면... 넌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흔들리는 갈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미 예감하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는 우리가 이 길을 따로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결국,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도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너를 떠올리지 않을까."


나는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었다.

'그게 뭐냐'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 순간 그의 대답이 참 다정하게 들렸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헤어졌다.


헤어진 후 처음으로 그 길을 다시 걸었을 때,

나는 그가 남긴 말을 떠올리며 멈춰 섰다.

갈대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고, 바람은 변함없이 그들을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없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동안 그 길을 걸을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바람이 불면 그가 했던 말들이 따라 불었고, 갈대가 흔들릴 때마다 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아무리 발걸음을 옮기려 해도, 자꾸만 그날의 대화에 발목이 잡혔다.

때로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다.


계절이 몇 번 바뀌었고, 감정도 조금씩 흐려졌다.


문득 깨닫게 된 건, 그가 떠나간 자리에는 더 이상 아픔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그립지 않은 것은, 내가 그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나를 괴롭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길을 걷지 않는다.


그 길은 결국 사라졌다.

새로운 도로 공사로 갈대는 베어졌고, 산책로는 아스팔트로 덮였다.

바람이 지나가던 흔적도, 흔들리던 갈대의 속삭임도 더 이상 그 자리에 없었다.


그날의 대화와 풍경은 이제 추억의 일부분이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장면을 때때로 떠올리며 글을 쓴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꺼내 보는 것처럼,

그 순간의 감정을 천천히 되짚으며 글로 옮긴다.


이제 그는 내 삶에 더 이상 영향을 주지 않는다.


다만 젊고 빛나던 나의 아름다운 시절로,

그날은 가끔 회상될 것이다.


사라진 길 위에서, 나는 여전히 이야기를 꺼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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