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빗속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하고 고생할 수도 있었는데...
Boente 보엔떼(A Peroxa 아 뻬록사) ~ O Pedrouzo 오 빼드로우소까지 26km
출발부터 비가 오락가락하는 통에 카메라는 일찌감치 비닐봉지 속으로 들어가 사진 몇 컷 건진 것 없는 하루였다.
aleman albergue를 출발해 큰 길가의 바르에서 까페 꼰 레체를 마시고 잠시 정신 차리고 다시 출발. 오늘은 북쪽 길과 프랑스 길이 만나는 아르수아 Arzua를 지나 오 뻬드로우소까지 갈 예정이다.
2시간 정도 걷자 아르수아다. 중심지 광장의 바르의 야외 테이블을 잡고 주문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더니 어제 장사를 정리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오전 장사에 손님이 많았었는지 치우지 않은 그릇, 잔이 빼곡하다. 간단히 콜라와 간식을 주문해 먹고 담배를 한대 말아 피우고, 담배가게를 찾아 나선다.
마을 끄트머리에서 담배가게를 발견하고 2주일 정도 피울 수 있는 담배 가루, 담배 종이를 사서 본선에 다시 오른다.
비가 꽤 많이 내리기도 해서 좀 불편한 점을 빼고는 덥지 않아 오히려 좋은 점도 있긴 하다. 작년 북쪽길을 걸을 때 아르수아를 지나 한적한 길에 피자를 직접 구워 파는 피자 전문점처럼 보였던 가게에 대한 기억이 있어 이곳에서 점심을 하려고 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 텐데 제법 컸었던 가게를 영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 폭우처럼 비가 쏟아져 할 수 없이 비를 피해 피자 파는 가게로 들어가 점심으로 페퍼로니 피자를 주문해 먹었다. 좁은 가게 한켠에 전기난로의 온기가 반가울 정도로 비는 차가웠고 공기는 싸늘한 편이었다. 맛있게 먹고 다시 걷는데 갑자기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한다. 점점 가려움이 심해져 비상약으로 챙겨 온 항 히스타민제를 한알 빨리 씹어먹었다. 하지만 증상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그래도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라서 열을 식혀가며 걷는다. 이럴 땐 비가 내려 다행이지 싶다. 잠시 지붕이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 두드러기를 달랬고 선배님은 날 위해 물을 사다 주었다. 이놈의 두드러기는 언제 어떻게 올라올지 알 수가 없으니. 잠시 쉬고 다시 자연 속의 길로 접어든다. 주변 풍경이 참 좋다. 비도 오락가락하는 게 계속 내리는 것보다는 훨 좋다.
차도 곁과 마을을 잇는 길을 따라 비를 맞으며 열심히 걷다가 오 뻬드로우소 근처 마을에서 Albergue Espiritu Xacobeo 알베르게 에스피리뚜 사꼬베오를 만났다. 좀 더 걸어 오 빼드로우소 본 마을까지 갈까 하다 빗속에서 더 걷는 것도 재미없고 순례자도 많이 보여 오늘은 걷기를 종료하려고 알베르게로 들어갔다. 제법 깨끗하고 잘 관리되는 듯 보이는 알베르게엔 관리자가 없어 기다려 본다. 잠시 후 종종 길에서 만났던 한국 청년 2명이 알베르게에 들어왔다. 아직 알베르게에 침대가 몇 개 남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관리자가 왔는데 체크를 해보더니 침대는 두 개 남았다고 한다. 아직 비가 많이 내리고 있던데 두 청년은 다시 길을 나서야 했다. 내가 미안해하자 손사래를 친다. 그러실 필요 없다고. 두 명 중 한 친구는 간호사를 하다가 순례길에 왔다고 했고 나의 피부 상태를 보고는 한국 병원에서 처방받아온 알레르기 약을 나눠 주었다. 그 친구는 쉴 때도 가방 내리고 다시 매는 게 싫어서 가방도 잘 벗지 않았는데 나를 위해 배낭을 풀고 약을 찾아 나에게 주고는 다시 길을 나섰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다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음날에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 잠시 또 만났는데 '오 뻬드로우소'에 알베르게가 없어서 상당히 많이 걸었다고 했다. 그 빗속에서 40km 넘게 걸었을 것이다.
오스삐딸레로는 배달 가능한 식당을 알려주고 잠시 후에 멜리데 마트에 장 볼 필요가 있는 순례자는 무료로 태워다 준다고 한다. 그래서 얼른 씻고 장 보러 다녀왔다.
비빔면을 위한 계란 국수면, 달걀, 와인, 과자, 즉석밥 등을 사가지고 알베르게 식당에서 조리한 후 정말 맛있게 먹었다. 역시 스파게티 면보다는 얇은 국수면의 식감이 훨씬 좋았다. 남은 고추장에 밥도 비벼먹으니 왕후장상의 밥상이 부럽지 않다. 제법 좋은 와인을 곁들인 만찬을 즐기고 침대에 올라 편안하게 휴식을 취해 본다.
알베르게에는 방이 여럿 있었고 늦은 시간엔 가족으로 보이는 한 무리가 승용차 3대를 타고 나타나 음식을 배달해서 시끌벅적하게 먹는다. 아무리 봐도 순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순례길의 끝자락엔 새로운 경험을 여러 개 한다.
이제 내일이면 목적지에 도착하고 선배님은 여행자 모드로, 나는 계속 순례자 모드로 더 걸을 예정이다.
침대에 앉아 포르투로 갈지 쁘리미띠보 길로 갈지 교통상황과 일정을 확인해 보니 쁘리미띠보로 가기엔 일정이 좀 부족하단걸 확인하고 포르투를 향해 걷기로 한다. 마지막 여정이 결정되었으므로 날짜에 맞춰 포르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하고 나니 뭔가 어정쩡하던 마음이 정리가 된다. 이젠 그냥 다시 일정에 맞춰 걷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