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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스텔 Apr 05. 2022

우리는 생일 같은 띠동갑 모녀 사이

Chapter 1. 가족 관계 실패 - <엄마 편>

  중학교 가정 수업을 좋아했던 나는 시험 성적이 잘 나와서 그 과목을 좋아했던 것도 있지만, 특히 성과 관련한 부분은 호기심이 많아서 어린 나이에도 그와 관련한 지식이 탄탄했다. 물론, 나의 성적(成績)에 관심이 많던 부모님이 내 가정 성적을 도와주기 위해 어쩌다 보니 성교육을 일찍 하게 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크게 도움이 되었다. 아무튼 성에 대한 지식은 바삭해서 아이가 태어나려면 몇 달을 품어야 정상적으로 태어나는지 정도는 그 나이 때에 당연히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부분이다. 그래서였나? 도대체 왜 부모님 결혼기념일과 나의 생일이 4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은 건지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부모님이 결혼을 하고 나를 낳았을 거라는 것이 상식상으로 맞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서 아빠가 하신 말씀을 듣고 명확히 그 이유를 알았다.


"너는 엄마랑 아빠를 이어준 결실이야."


  혼전임신이셨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감흥도 없던 이야기가 그 어린 나이 때는 뭐 그리 충격이었는지 한동안은 벙쪄 있던 날들이 생각이 난다. 아무튼 나는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있고 4달 후 태어났고, 원래 예정일보다 늦게 태어났는데 그날은 여느 날보다도 조금은 특별한 날이었다.


"에휴, 아침에 미역국 먹고 있는데 병원에 끌려갔잖니."


 그날 생각을 하면 제법 고생을 하셨던 건지 한숨을 짧게 내쉬며 엄마는 이야기하셨다. 정확히 12시 57분경 나는 엄마 생일날 태어났다. 그것도 그 해는 엄마의 띠였던 토끼띠 해였고, 나는 그렇게 신기할 정도로 낮은 확률로 엄마의 생일날 엄마와 같은 띠로 태어났다. 정말 지금 다시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예정일보다 늦게 태어난 것도 엄마 생일에 맞춰 태어나려고 했던 걸까. 하지만 생일이 같고, 띠마저도 같은 사이면 영혼의 단짝이라고 불릴 만큼 죽이 척척 맞을 법한데도 사실 우리 사이는 아쉽게 그러지 못했다.


"전생이 있었다면 너랑 나는 원수 사이였을 거야."


  매번 엄마랑 부딪힐 때면 나를 쏘아붙이며 하던 엄마의 말씀이셨다. 지금이야 내가 성인이 되기도 했고, 자취를 하고 있어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에 부딪힐 일이 적지만 어릴 적에는 정말 많이 부딪혔었다. 여러 방면으로 많이 부딪혔었는데 대부분 그 이유는 교육과 연관돼서 부딪히는 일이 잦았다고 해도 무방했다. 나는 돌잡이 때 연필을 잡았는데 처음엔 그것 때문에 내가 공부가 적성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지 쥐 잡듯이 나의 교육에 힘을 쓰셨다. 아직도 5살 때 처음 교육용 학습지를 풀고 맞춘 게 없다는 이유로 혼났던 게 머릿속에 생생한 것을 보면 정말이지 많이 혼났었던 거 같다.


  엄마가 내 교육에 얼마나 신경을 썼냐 하면 휴대폰만 봐도 알 수 있다.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을 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절대로 사주지 않으시겠다고 엄포를 내리셨다. 아무래도 학업에 방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는지 휴대폰을 사주지 않으셨는데 특히 이 휴대폰에 대해 엄마께서 얼마나 예민하셨는지는 내 유치원 때 일만 해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내가 유치원 때는 여자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엔젤이 휴대폰'이라는 장난감이 있었다. 내 유치원 친구들도 나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그 장난감 휴대폰을 가지고 싶다고 파리처럼 하늘에다 대고 두 손을 싹싹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엄마 앞에서도 착한 일을 하면서 엔젤이 휴대폰을 가지고 싶다고 외쳤지만 크리스마스 당일이 되었을 때 내 친구들과 나는 희비가 엇갈렸다.


"산타 할아버지... 저는 왜 반짝이풀인가요?"


  친구들이 엔젤이 휴대폰을 가지고 신나 할 때 나는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반짝이풀을 선물 받았는지 도무지 이해 가지 않았고 그저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고요. 그때는 산타의 정체를 몰라 산타를 원망했지만, 그 선물을 준비한 것이 우리 엄마임을 머리가 크고서 알았을 때 그렇게 배신감이 컸던 적이 없다. 그렇게까지 휴대폰 관련한 그 모든 것을 사주시기 싫으셨나. 물론, 그렇게 휴대폰을 중학교까지 사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내리셨던 엄마셨지만 한창 학교 내에서 있었던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입상하면 사준다고 이야기하셨고, 나는 필사적으로 준비한 끝에 1년 빨리 휴대폰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휴대폰으로 하여금 내게 어떤 재앙들이 일어날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너 휴대폰 가지고 나와."


  아직도 그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한창 초등학교 때는 학원살이를 하느라 바빴지만, 학원 내 경쟁에 지친 내가 학원 다니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하면서 중학교 때부터는 독학을 시작했다. 당연히 초등학교 때는 학원이라는 곳이 나를 잡아주고는 했지만 독학을 하고나서부터는 잡아주는 곳이 엄마를 제외하고는 없었기에 나 스스로가 보아도 많이 풀어진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내 의견을 존중하셨던 건 성적은 생각 외로 잘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독학을 하다 보니까 공부하는 시간도 내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기에 학원 다닐 때보다 시간적 여유가 충분했는데 그럴 때마다 내가 손에 놓지 않고 있었던 게 항상 휴대폰이었다.


  원래는 KBS 9시 뉴스 소리가 들리면 나와 내 동생들은 쪼르륵 하던 일을 멈추고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는 게 규칙이었다. 그런데 그 휴대폰을 쥐게 된 이후로 나는 엄마 눈을 피해 밤늦게까지 휴대폰을 하는 빈도가 잦아졌고 그렇게 어느 날은 그 휴대폰을 늦게까지 하느라 자지 않는다는 것을 걸린 적이 있었다. 그 날부로 나에게는 9시만 되면 휴대폰을 머리맡이 아닌 바깥에 꺼내놓는 엄마와의 약속이 새로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한창 휴대폰에 미쳐있던 중이병인 나를 누가 막으랴. 이 잔머리로 공부를 더 했으면 전교 1등은 가뿐했을 텐데. 나는 엄마의 눈을 속여 휴대폰의 카드 케이스만 바깥에 제출하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 덕분에 한동안은 그 어두운 밤이 심심하진 않았지만, 거짓말은 특히 엄마한테 하는 거짓말은 늘 들통나기 십상이었다.


"휴대폰 안 들고 오지? 내가 가지고 와?"

"아... 엄마 진정하면 안 돼? 아 이건 아니잖아."

"하나, 둘."


  저놈의 하나 둘. 저 숫자가 흘러갈 때면 뭐가 그리도 조급한지 나도 모르게 멈추었던 행동을 재촉이게 된다. 밤에 몰래 이불 안에서 했던 휴대폰은 애석하게도 휴대폰의 밝은 불빛 때문에 쉽게 들킬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걸리자마자 엄마는 자신을 기만했다는 생각에 화가 잔뜩 나신 거 같았다. 잘못은 누가 봐도 엄마를 속인 내쪽이 잘못한 것이 맞지만 그때 당시 나로서는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일이 내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아니, 진짜 이건 아니잖아 엄마!!"


  무려 망치를 들고 와서 나의 휴대폰 액정을 깨부순 엄마는 내가 앞에서 서글피 우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셨다. 정말이지 그때 생각해도 지금 생각해도 우리 엄마는 정말로 독한 사람이란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망치를 들 정도로 잔혹한 우리 엄마는 나의 초, 중학교 시절 나의 교육에 지독하던 사람이셨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내 동생들이 커가면서 점차 엄마의 딸들을 위한 교육 집착은 줄어들었다.


"엄마 나는 그렇게 공부로 잡았으면서... 애들한테는 왜 안 그래?"

"그러게... 안 그러게 되네."

"엄마 그냥 나한테 시비 걸기 편해서 그랬던 거지?!"

"흐흐. 그런가?"


 사실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동생들이 공부를 잘해서? 아니, 공부하는 것에 터치하지 않기에는 동생들이 공부를 월등하게 잘하는 편은 또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내가 항상 시비 걸기에 좋은 조건이어서 그랬나. 가만 보면 항상 공부뿐만이 아니라 엄마는 다른 부분에서도 늘 그랬다. 나한테는 중학생 때가 아니면 사주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이 동생들 때부터는 흐지부지 돼서는 나보다도 일찍이 동생들이 휴대폰을 이유 없이 받았다. 또, 항상 밖에서 놀다가 저녁 6시 안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열심히 혼내던 엄마가 동생들이 늦으면 별말이 없으시곤 했다. 동생들과 나를 차별하는 걸까.


"엄마는 네가 처음이었잖아."


  엄마는 내가 어릴 때 이야기를 꺼내시면서 이야기하셨다. 나는 셋 딸 중 장녀로 태어났는데 엄마는 엄마한테 첫 딸이 나였기에 늘 나를 키울 때 예민하게 키우셨다고 한다. 어릴 때 깰까 봐 늘 조심조심 굴기도 했고, 조금 커서도 첫 아이니까라는 마음으로 늘 키우셔서 내게 예민했다고 하셨다. 특히 교육에 목을 매신 이유에 대해서는 엄마의 어릴 때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엄마가 고등학교까지밖에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한 한 때문인 듯했다.


"고등학교 나온 거랑 대학교까지 나온 건 달라."


  엄마처럼 몸이 힘들지 않으려면. 엄마는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는 지금에서야 당신이 나의 교육에 목을 매셨는지는 이해한다. 엄마 당신께서는 고등학교까지 나오시고 대학을 간 삼촌과 달리 일찍이 전라도에서 서울로 올라와 취업 전선에 뛰어드셨다고 했다. 내가 태어나자 엄마는 당신의 커리어를 접으시고 육아에 전념하셨고, 내가 크면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셨다. 하지만, 고등학교까지 나온 우리 엄마가 할 수 있는 일들은 극히 적었고 그런 엄마는 몸집이 왜소함에도 불구하고 그 가녀린 몸으로 항상 무거운 물류창고에서 힘든 일을 하셨다. 그럴 때면 매번 일이 힘들어 퉁퉁 부은 손을 보며 축 처져 계셨는데 아마 그런 힘듦을 당신이 겪으시고 그런 아쉬움을 표출한 게 내 교육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제는 그렇게 안 해. 너희 인생이지 내 인생이 아니잖아."


  나로 하여금 경험을 해서인지 조금은 유해진 엄마가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내가 첫째 딸이었으니 교육이라는 관심으로 나를 지독히 키우셨다. 아무래도 당신과 같이 생일도 똑같고 띠도 같은 내가 엄마 당신이 말하는 그런 엄마의 힘들었던 삶을 똑같이 살까 봐서였을까. 어릴 적에는 항상 모르고 머리가 크고서야 늘 엄마의 의도를 알게 되는 이 상황이 그저 안타깝지만 그런 일련의 과정이 우리 모녀를 더욱 견고히 했을 거라 생각한다.


"다른 집 모녀들은 친구처럼 잘 지내더라."

"엄마, 꼭 그런 것만은 아니더라."


  항상 엄마와 지독히 싸울 때면 우리는 왜 이렇게 항상 싸우느냐고 하던 엄마께 전하고 싶은 말이다. 적어도 내 주변 장녀들은 엄마랑 친해 보이는 듯해도 늘 안 보이는 데서 맞지 않는 서로를 맞춰가며 열렬한 투쟁 중이라고 말이다. 누군가 말하기를 엄마 앞에 나타난 자녀는 세상에 네 뜻대로 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라고 보여주는 것의 증거라고 했다. 서로 맞추지 못해 많이 다퉜지만, 앞으로도 더할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모녀 사이는 더욱 견고해지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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