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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재동 May 04. 2022

택시 기사가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본 세상만사

눈(雪)과 눈(目)

이야기 열둘

            눈(雪)과 눈(目)

                  고재동(시인ㆍ택시 기사)


  집안 보일러 온도를 2도 낮추었다.

  불고기를 절이려다 말고 아내가 내게 주문했다.

  "여보, 일  나가기 전 불고기 양념 좀 사다 주고 가요."

  "아니. 난 어떤 걸 사야 하는지 잘 몰라. 당신이 따라가서 사 오면 안 될까?"

  아내와 함께 현관문을 열고 나서는데 함박눈이 어둠을 사르며 사륵사륵 내리는 게 아닌가. 다섯 번째 눈. 올해 들어 네 번째 눈이다.

  "눈이 많이 오네요. 길이 미끄러울 것 같은데요?"

  "그렇군. 큰길이야 염화칼슘을 뿌려 괜찮겠지만 이면도로라든가 골목길은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이번 겨울 들어 가장 많은 눈이 내리려나 봐요. 당신 일 나가지 않는 게 어때요?"

  "앞으로 얼마나 더 눈이 내릴지도 알 수 없고, 오늘 그만 쉴까?"

  "그렇게 해요. 당신이 사장인데 당신 맘대로 하면 되죠. 괜히 욕심냈다가 미끄러지는 것보다 낫죠. 마음 내려놓고 편히 쉬세요."

  "그럼, 그럴까? 내가 사장이지, 참. 하하하..."

  농협 마트에서 불고기 양념 등을 사서 마당으로 오르자 억이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격하게 반긴다. 눈을 따라 아까부터 나와 있음인지 우리를 맞기 위해서 다시 나왔는지 반가움이 석연하다. 조금 전 집을 나설 때는 '가지 마세요. 나 혼자 집을 어떻게 지키라고... 눈도 오는데'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젠 안심한 눈으로 우리를 반긴다. 억이가 눈치 백 단이다. 내가 일 나갈 때와 들어올 때 반응이 판이하다. 제 엄마 때는 더하다. 걸어서 나갔다가 걸어서 들어오면서 반드시 출필고 반필면 하니까.

  "억이도 우리 둘이 집에 있길 바라요. 안심이 되나 봐요?"

  "그 녀석, 참. 오늘 밤 억이 몰래 우리 손잡고 잘까?"

  어젯밤 몇 번 확인할 때만 해도 눈은 여전했는데 아침에 나서니 그리 많은 눈은 내리지 않았다. 집을 내려올 때 조금 조심하고 나니 길은 확 트여 있었다. 염화칼슘을 대량 살포한 덕택이긴 했지만. 일했어도 충분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내에게 속내를 보이지는 않았다.

  한 달 전 백내장 수술한 눈(目)을 점검받기 위해 눈(雪)길 따라 서울로 향하는 아내와 터미널로 가는 길은 염화칼슘이 하얗게 융단을 깔았다.

  이틀 전 네 번째 눈은 초저녁에 찔끔 포도 위에 흩날리다가 말았다. 눈이 가버렸으면 손님이라도 와야 하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맘대로 되는 것이 그리 흔하던가.

  밤 9시. 옥동의 상가 불이 동시에 꺼지고, 네 번째 눈이 내린 사실을 제대로 알 턱 없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우리 세상이다. 서로 택시를 잡으려 아우성친다. 호출은 불이 나고 택시 정류장의 질서는 무너져 있었다. 맨날 이런 날, 이런 때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순발력이 뛰어난 젊은 친구 둘이 내 택시를 차지했다.

  "아무리 얌체라고 해도 먼저 잡는 게 장땡이라니까."

  "오늘 운이 좋았어. 저 사람들 10분, 20분 추위에 떨어야 할걸."

  (경하드리옵니다, 손님들.)

  "차라리 밤 9시로 시간 제한한 게 잘 됐지, 싶다."

  "맞아. 이처럼 회식도 1차로 끝나고 일찍 집에 갈 수 있잖아."

  (저, 자영업자들과 우리와 같은 소상공인은 어찌하옵니까?)

  "2차, 3차 노래방까지 꼰대들 따라다니고 나면 녹초가 된단 말이야."

  "억지 춘향 격으로 트로트 몇 곡도 준비해야 한다니까. 우리 부장님을 누가 말려?"

  ('너 늙어 봤냐? 나 젊어 봤단다.' 젊은이들도 머잖아 늙는답니다. 아랫사람들이 들어오면 꼰대라고 부를 걸요, 아마.)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손님의 대화에 들어내 놓고 끼어들 수는 없었다. 그때 제설차가 멀쩡한 도로를 앞서가며 염화칼슘을 뿌리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도로는 진작 염화칼슘을 뿌려 젖어있거나 허옇게 마른 곳도 있는 터였다.

  "언제 눈이 내리기나 했던가? 눈을 씻고 봐도 눈이 없는데 저 제설차가 왜 다녀?"

  "그러네. 아마 내가 듣기론 저 제설차도 택시처럼 미터기가 달렸다고 하네. 많이 다녀야 많은 돈을 벌 수가 있다나 봐."

  (나도 들은 적이 있답니다. 그전까지는 1년씩 계약을 했는데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왠지 시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들어 기발하게 미터기 장착한 제설차 구상을 한 것 같더라고요.)

  "저처럼 무자비하게 염화칼슘을 살포하면 도로 위를 다니는 차들은 어쩌라고... 차 하부가 다 썪는다구."

  "아침 출근길에 차가 미끄러져도 낭패 아닌가? 민원이 폭발할 텐데..."

  (짚신 장사 아들과 우산 장사 아들을 각각 둔 부모 마음이겠군요.)

       (1)

할머니는

백내장을 앓아 30년간

뜬눈으로 세상과 결별하셨다

민며느리로 일곱에

방랑벽이 심했던 할아버지 만나

반세기 동안 기다리는 삶을 사셨다

군에 간 맏손자를

기다리다가 여든일곱에

박 씨라는 이름도 지우셨다

호적부에는 백열일곱 살

30년간 남의 생을 사셨다

막냇동생이

할매, 이름이 뭐로? 하니 영옥이란다

한 번도 불러 준 적 없는 그 이름 면서기는 박 씨만 기억한다

할배는 알고 계셨겠지

       (2)

앵두꽃 질 때 죽단화 핀다

자두꽃 질 때 배꽃 핀다

경자 누나 닮은

백옥 같은 배꽃은

작은방 창가에 뜬눈으로 지새운다

발갛게 앵두가

매혹적으로 익어가는 데도

새콤달콤 자두가

탐스럽게 익을 때도

그늘에서 죽단화 핀다

그 누가

이름 한 번 불러 주지 않아도

봄이 다 가도록 둑 아래 머물다

불평 한마디 없이

개나리 꽃잎처럼 노랗게 진다

                 --<죽단화>

  고양이에게 카메라를 장착하여 심장이 뛸 때마다 촬영할 수 있게 장치하여 내보냈더니 가장 먼저 꽃 앞에 멈춰 섰다고 한다. 꽃을 촬영한 후 고양이(이성인 듯) 사진이 찍혔고 강아지 사진도 찍혔다고 한다. 마지막에 주인 사진이 찍혀 있었다. 격하게 반가워서 달려와서인지 흔들린 사진이 찍혀 있었단다.

  나는 과연 꽃 앞에서 설렜던가? 아내 앞에서 얼마큼 설렘이 있었던가? 돌아봐도 확고한 답을 쓸 수가 없다. 고양이만도 못 하게, 아무 쓸모없이 늙어버린 걸까?

  아내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주말까지 사나흘쯤이야 문제없다. 지난번 열흘 이상 아내가 집을 비웠을 때도 무던히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추워서인지 참새도 기침하지 않았다. 절간 같다. 2도 낮춰 휑한 집. 잠을 보충하기 위해 이불속을 파고들었다. 꿈결에도 내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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