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41개월을 넘어선 우리 아들은 지구본을 좋아한다. 지구본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나라들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며 한참을 혼자 까르르 거린다.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국가는 당연히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위치를 익히고는, 다른 나라들을 찾아본다. 지난달 한참 찾았던 국가는 베트남이다. 베트남 여행을 다녀오며, 베트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지구본에서도 자주 찾아본다. 또 가고 싶다는 말과 함께. 미국도 일본도 나름의 이유로 좋아한다. 미국은 유아 시절 집에 놀러 온 아빠 친구가 거주하는 국가라서, 일본은 어린이집 친구가 오랜 기간 여행을 갔던 곳이라 뇌리에 남아서인지, 일본도 가끔 찾아본다.
이 많은 나라를 제치고 최근 최애 국가로 등극한 곳은 영국이다. 영국과 관련된 그림책 몇 권을 읽더니 "영국빠"가 되었다. 영국의 타워브리지도 빅벤도 런던아이도 책에서 그림으로 배우고 사랑에 빠졌다. 무엇보다 영국의 여왕님과 근위병이 나오는 그림책을 보고는 영국홀릭이 되었다. 영국에 가서 근위병도 여왕님도 보고 싶다고 난리이다. (여왕님은 이제 못 보는데 ㅠㅠ)
누굴 닮아 벌써부터 허파에 바람이 들어 외국을 탐험하려 하는 걸까?
1990년대의 어느 날, 눈치를 보며 킨 컴퓨터 화면에는 끝없는 바다와 항구, 그리고 범선들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모니터 앞에는 시험에 나오지 않는 교과서인 '사회과부도'가 펼쳐져 있다. 모니터에 펼쳐져 있는 것은 바로 '대항해시대2'. 대항해시대는 단순 게임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세계를 배 한 척으로 탐험해 볼 수 있는 창이었고, 역사와 지리를 배우는 최고의 교과서였다.
대항해시대는 삼국지 시리즈로도 유명한 KOEI에서 개발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시리즈이다. 동명의 역사적 이벤트로도 유명한 대항해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게임으로, 플레이어는 선장이 되어 세계를 탐험하고, 무역을 하며, 해전도 치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항해시대 2부터 해서 4탄까지 플레이를 했고,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즐기다, 최근에는 대항해시대 모바일까지 섭렵하며 30년이 넘은 팬심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중 최고의 시리즈는 단연코 <대항해시대2>이다.
대항해시대2의 장점 중 하나는 캐릭터의 풍부함이다. 여자 해적을 원하면 '카탈리나 에란초'를, 영국 해군이 되고 싶으면 '옷토 스피노라'를, 메르카토르의 지도 완성을 위한 세계 일주가 하고 싶다면 '에르네스트 로페스'를, 모험을 진정 하고 싶다면 '피에트로 콘티'를, 대상인이 되고 싶다면 '알 베자스'를 선택하면 된다.
그리고 이를 모두 종합한 주인공. 프레스터 존 왕국을 찾아 떠나는 포르투갈의 '조안 페레로'도 있다. 조안 페레로는 주인공답게 스토리도 가장 깊이가 있고 무역과 전쟁, 탐험도 모두 맛볼 수 있어 인기가 많았다. 훗날 대항해시대 온라인을 하며 알게 된 길드원 중 변호사 친구는 이때 조안 페레로에 빠져 신혼여행을 포르투갈로 다녀왔다고 할 정도이니. :)
그러면 당시 초딩들에게 사회과부도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험에도 나오지 않는 말 그대로 별책부록의 교과서가 다 너덜너덜해지도록 봤던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을 시작하면, 주인공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항구를 떠나 출항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세비야'나 '베네치아'같은 항구로 가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도시들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이야 공략도 인터넷으로 바로 찾을 수 있고, 구글 맵으로 도시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최근 대항해시대 모바일 같은 게임을 하는 유저들 중 구글 맵을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 하지만 당시에는 정보를 얻을 창구가 없었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 사회과부도를 펼치는 것이다.
사회과부도의 유럽 지도에서 세비야의 위치를 찾는다. 리스본에서 남쪽으로 가다가 좌로 틀어서 직진을 하면 세비야가 나온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게임 상에서도 그렇게 항해를 한다. 그러다 세비야가 나왔을 때 느끼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유럽의 도시들 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시들의 위치를 찾아가며 밤새 항해를 했다.
유럽의 도시들이 익숙해지면 다음으로 돈을 벌어야 한다. 처음 하는 초딩들에게 무역 전략을 세우는 것은 쉽지만은 않다. 하지만, 초딩들이 누구인가? 겨우 알아낸 정보들(대부분 동네 형아들이 알려줌)을 공유해 가며 각자만의 바다에서 돈을 벌어간다.
포르투갈의 조안 페레로로 시작하면 처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돌소금을 사서 유럽에 파는 것이다. 이득은 크지 않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나름 짭짤하다. 소금이라서 짭짤한 것이 아니라 그 약간의 수익이 초심자에게는 꽤나 짭잘하단 의미다.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대서양으로 조금만 나가면 호날두의 고향 마데이라가 나온다. 이곳의 설탕이 아주 짭짤하다. 설탕임에도 정말 짭짤한 돈을 안겨준다.
그러다 한 친구가 알려준 고급정보.
이스탄불의 융단을 사서, 아테네에 팔고, 아테네의 미술품을 사서 이스탄불에 팔기! 이스탄불과 아테네는 정말 가깝다. 그런데 두 곳의 특산품을 사고 파는 것만으로 떼 돈을 벌 수 있다. 사실상의 치트키였다. 이렇게 돈을 벌고 좋은 배도 사고 이제 먼 바다로 떠난다. 그전에 앤트워프에서 '쉽'도 구매하고, 톰북투에 가서 아이템을 사는 걸 잊으면 안 된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 진정한 대항해시대가 시작된다. 모험도 전투도 이제 두렵지 않다.
대항해시대라는 게임과 사회과부도 덕분에 전세계 항구 이름은 다 외웠다. 비록 메르카토르 방식의 지도에서 항해라 거리의 왜곡은 있었지만, 지리적 지식을 쌓는 데 이만한 게임이 있나 싶다.
물론 대항해시대라는 역사적 배경이 마냥 낭만의 시대라고는 할 수 없다. 서구 중심의 역사관에서 대항해시대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계 여러 문명이 서로 교류하여 인류 역사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이다. 하지만 유럽 이외의 국가들에겐 악몽의 시작이었다. 유럽에서 온 대형 함선들은 자원을 약탈했고, 뒤이어 제국주의로 무장한 군대들이 들어와 식민지를 마구 늘려갔다.
그럼에도 우리가 아직 대항해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역사에 열광하고, 대항해시대 게임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것은 이들이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험과 발견의 기쁨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게임 속에서 미지의 바다를 향해 모험을 경험하며 과거 바다를 향해 나아갔던 인류의 경험을 간접체험할 수 있었다.
인류는 언제나 모험을 갈구한다. 목숨을 건 모험에서 이루는 성취와 이에 따른 어마어마한 보상을 추구한다. 대항해시대가 그랬고, 미국의 서부개척이 그랬고, 이름 모를 폴리네시아인의 이스터섬 이주가 그랬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인류의 역사를 건 모험을 할 '장소'가 남아있지 않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제 눈을 우주로 돌리고 있다.
한동안 영국에 빠져있던 아이는 최근 어디서 들었는지 모를 나라 하나에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북한이다. (절대로 부모가 알려준 거 아님)
정말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최근 지구본을 들고 북한을 자꾸 찾는다. 그리고 하는 말.
"북한 어디야?"
"북한 어떻게 가야 해?"
"북한 위로 가면 된다는데 계단으로 위로 가면 돼?"
얼마전에는 밖에 놀러가자고 떼를 쓰길래, 어디 갈까 물어봤더니.
"북한가자! 지하철 타고 내려서 버스 타고 북한가자!"
갑자기 친북이 된 녀석. 그리고 또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이야기도 한다.
"북한에 먹을 거 없어?"
"내가 햄버거 사줄게"
"북한 가자"
누가 대화 들으면 의심을 할까 두려움에 떠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