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을 다녀와서
나 이 그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는 '영국 내셔널갤러리 명화전, 거장의 시선 사람을 향하다'에 지난 주말 다녀왔다. 한국에서 쉽게 보기 힘든 작품들이 대거 왔다는 점을 방증이라도 하듯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쾌적하게 관람하긴 쉽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을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관람을 하였다. 라파엘로, 카라바조, 벨라스케스, 반 다이크, 마네, 모네, 르누아르, 고갱, 반 고흐 등 거장들의 작품들 하나하나가 위엄을 뽐내고 있다. 특히, 영국이 사랑하는 그림인 토머스 로렌스의 '레드 보이'는 한국에서도 인기스타이다. 워낙 거장들의 작품들이 많아서일까. 오늘의 주인공인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조금 푸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전시장의 메인이나 가운데가 아닌 약간 구석진 곳에 위치했던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와이프가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보고 한 말
"나 이 그림 어디서 봤어!"
우리 부부는 미술관 가는 것을 좋아한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 뉴욕의 메트로폴리미술관, 피렌체의 우피치미술관,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 등을 함께 관람한 우리 부부지만 그림을 보는 스타일은 정반대이다. 나는 화가와 그 화가가 무슨 사조를 가지고 있는지 등에 관심이 많다면, 와이프는 그냥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일까. 렘브란트가 평생을 거쳐 남긴 수많은 자화상을 세계 곳곳에서 봐왔으면서도 한국에 온 노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고 어디서 봤다는 감상평을 먼저 남긴 것이다.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국보급 화가, '빛의 화가' 렘브란트(1606~1669)는 빛의 효과를 강조한 명암대비로 유명하지만, 우리가 렘브란트를 친숙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그의 자화상 때문이다. 렘브란트는 평생에 걸쳐 50점 이상의 유화와 30점 이상의 에칭, 셀 수 없이 많은 드로잉 자화상을 제작하였다. 그중 렘브란트의 사망 직전 그린 최후의 모습과 가장 유사한 자화상이 영국내셔널갤러리에 전시가 되어있다가 이번에 한국으로 온 것이다.
1669년 렘브란트의 사망 이후 그의 자화상은 더 이상 그려지지 않는다. 당연히 그의 사망 이후 그의 자화상은 그려지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네덜란드의 광고회사 제이월터톰슨(J. Walter Thomson)이 기획하고 금융기업 ING 후원, MS와 네덜란드 델프트 공대 개발진 참여로 진행된 프로젝트 더 넥스트 렘브란트. 이 프로젝트의 주목적은 인공지능이 렘브란트의 작품을 학습해 그의 생전 화풍을 답습하여 자화상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인공지능은 딥러닝 기법을 활용하여 렘브란트의 그림 346점의 구도, 색채감, 붓터치 같은 특징을 학습한다.
그리고 개발진은 인공지능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를 내린다.
모자를 쓰고 하얀 깃 장식과 검은색 옷을 착용한
30~40대 백인 남성을 렘브란트 화풍으로 그려라
인공지능은 18개월 간 학습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그림을 그리게 되고, 개발진은 이를 3D프린터로 그림의 질감과 붓터치까지 재현을 한다. 인공지능은 붓질의 방향, 물감의 높이까지 학습을 하여 재현을 하였고, 3D프린터로 출력된 결과는 1억 4,8000만 픽셀 이상의 13개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다.
인공지능이 새롭게 창조한 렘브란트의 새로운 자화상은 공개되자마자 대중의 큰 관심을 받게 된다. 트위터 상에서 공개 며칠 만에 1,000만 번 이상 언급되었으며, 프로젝트를 주도한 광고회사 제이월터톰슨은 세계적 광고 페스티벌인 칸 국제 광고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게 된다.
2023년인 지금. 우리는 이미 많은 미디어를 통해 렘브란트 외에도 반 고흐 등 유명 화가의 화풍을 따라 하는 인공지능을 많이 접하였다. 또한, 유명 화가들의 다수 작품을 학습하여 새로운 화풍을 가진 그림을 만드는 인공지능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2016년의 렘브란트 자화상이 이제는 새롭거나 놀랍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인공지능이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것도 렘브란트의 붓터치와 화풍을 그대로 살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큰 충격과 논란을 가져왔었다.
그럼 그 수많은 거장들 중 왜 렘브란트의 그림이 인공지능의 첫 선택을 받게 된 것일까? 자세한 속내야 프로젝트 기획자와 개발진만 알겠지만 나름의 이유를 한 번 찾아보도록 하자.
왜 인공지능의 선택은 렘브란트였을까?
각 나라마다 국보급 화가가 있다. 특히 유럽의 경우 각국을 상징하는 화가들끼리 우열을 가리는 시도들이 종종 벌어지기도 하며, 저마다 자기네 나라 화가들을 최고로 여긴다. 네덜란드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네덜란드는 북유럽 회화를 주도한 나라로 오늘의 주인공 렘브란트를 비롯하여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 유화를 최초로 만든 얀 반 에이크 등 거장들이 즐비한 나라이다. 수많은 거장들 중에서도 네덜란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평가받는, 그래서 화폐에도 올라간 인물인 렘브란트를 네덜란드 사람들은 가장 사랑한다.
더 넥스트 렘브란트 프로젝트는 이러한 배경을 가진 네덜란드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이다. 네덜란드 광고회사 제이월터톰슨, 네덜란드 금융회사 ING가 주도를 한 프로젝트에서 렘브란트 그림을 재현하지 않으면 어떤 화가의 그림을 재현하겠는가. 마치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을 꼽을 때 이순신 장군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가 가장 먼저 고려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렘브란트가 네덜란드 국적이어서 인공지능의 첫 선택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만약 내가 해당 프로젝트 개발자였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렘브란트의 작품을 재현해보고자 했을 것이다. 왜 인공지능은 렘브란트 그림을 그리기가 용이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렘브란트가 평생에 걸쳐 자화상을 엄청나게 남겼기 때문이다. 똑같은 피사체인 본인을 놓고 평생에 걸쳐 남긴 그의 수많은 자화상들은 인공지능이 학습하는 데 있어 아주 든든한 데이터원이 된다. 인공지능은 기본적으로 학습 데이터가 잘 갖춰져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렘브란트가 남긴 수많은 자화상은 그의 화풍을 학습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소스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나 2016년 당시에는 CNN이나 GAN과 같은 이미지 관련 딥러닝 기술의 초창기 시절이기 때문에 학습 데이터가 정확하면서도 많아야 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은 렘브란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수많은 자화상을 평생에 걸쳐 남겼기 때문에.
단순히 그가 자화상을 많이 남겨서 인공지능이 선택했다고 하고 끝내기에는 렘브란트가 그린 자화상에 대한 폄하일 수 있다. 수많은 그림을 남긴 많은 화가들 중에서 인공지능이 선택한 첫 화가가 렘브란트였다는 것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 가지는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의 저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인간의 마음속을 꿰뚫어 본 결정체다.
본인에 대한 미화 하나 없는 그의 자화상. 자신감에 넘치거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여느 자화상가 달리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본인의 생로병사를 빛과 어둠의 극적 대비를 활용해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과장이나 미화 없이 청년시절의 생기 넘침, 중년의 원숙함, 노년의 쓸씀 함이 그의 자화상을 통해 그대로 묻어 나온다. 그가 자화상을 통해 얘기하는 본인의 평생이 너무나도 우리 마음을 울리기에 네덜란드 사람들도, 아니 전 세계 사람들도, 심지어 인공지능도 그의 작품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렘브란트 그림에 빠져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우리 아들은 카라바조 그림이 아주 인상적이었나 보다. 전시회 다녀온 후 찍은 사진을 볼 때, 다른 작품들을 찍은 사진에는 큰 반응이 없는데 카라바조 그림을 보고는 계속 이야기한다.
"아저씨 아야 해"
"뱀이 물어서 아야 해"
(뱀이 아니라 도마뱀이지만 ㅎㅎ)
역시 카라바조의 강렬함은 어린아이도 알아보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