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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석이

by SM Mar 28. 2025

참으로 우연히 민석이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2022년 8월 더운 여름 능이백숙으로 보신하자며 가진 대학친구 술자리였다.

우리들 중 가장 IT에 익숙하지 않은 계춘이의 ‘구글링’ 능력을 시험해보다가 어이없게 서강가족 위령미사 명단에 '장민석 90 경제' 가 있었다.  

처음 민석이의 죽음을 접한 직후에는 생각보다 그의 죽음이 놀랍거나 슬프지 않았다.

연락이 끊어진 6-7년의 세월이 이미 그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 같은 것들을 희석시킨지 오래인 모양이다. 아니면 내 스스로 사람 사이에 발생하는 여러 감정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감정들이 불필요하다거나 뭔가 잘못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학교 교무처에 연락했더니 미국에서 심장 관련으로 사망했다고 가족이 전해왔다고 했다. 아주 건강체질은 아니었으나 민석이가 그런 질환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쉽게 믿기지 않았다. 

민석이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무역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유명한 무용 교수님이셨다. 어머니는 공교롭게 내 여동생의 대학교 은사님이시기도 하여서 나중에 다른 인연으로 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은평구 신사동에 마당딸린 2층 양옥집에 살았는데 전형적인 부잣집의 모습이었고 집에는 일하는 가정부도 있었다.  민석이의 입성이나 하고 다니는 것이나 품행으로 봤을때 대번 큰 어려움없이 자랐다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민석이는 다혈질이었고 마음이 여린 친구였다. 1990년 소위 운동권 끝물에 입학한 우리들은 대학 오리엔테이션 첫날부터 소위 민주화/의식화 교육을 받았다. 민석이는 빠르게 흡수했고 빠르게 분노했다. 입학하기 무섭게 학과 내에 운동권 학회에 가입했고 학년 과대표를 했고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입학 때 부터 골초여서 늘 삐딱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이제는 기억도 없는 주제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집회나 시위가 있을 때면 마른 몸에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던 기억이 있고 술을 그리 잘 마시지 않았는데 많이 마셨고 늘 취했고 취하면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실제 학생운동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대다수 2학년 혹은 늦어도 3학년 마치고 군대 갔다 오던 친구들 사이에서 민석이는 군대에 가지 않았고 학교에 남았고 결국 겨우 학교를 졸업하고 학사장교로 군대를 갔다.

민석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은 1998년이니 그때는 이미 같이 어울리던 친구들 모두 취직해서 자리 잡고 회사생활을 하던 시점이었다.

추측하건데 낮은 학점이나 늦은 졸업 때문이겠지만 국내에서 취업을 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고 형님이 미국에서 자리 잡고 있어서 미국 대학원 졸업을 돌파구로 삼았던 듯 하다.

유학 초반에는 종종 연락이 되었다. 나와 친구 몇은 시카고에 출장 등으로 가게 되었을 때 민석이 자취집에서 낄낄거리며 술을 마시고 며칠 신세를 졌던 기억도 있었다.

연락이 끊어 진 것은 대략 2000년 후반정도 였던 것 같다. 대학원을 졸업할 무렵에 한국에 취업을 시도했고 그 중 한 두 군데는 상당히 높은 가능성을 점치고 기대를 했었다. HR을 담당하는 입장에서 이력서며 면접이며 약간의 코치를 해줬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국내 취업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이 시점에 가장 큰 좌절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십년이 넘게 흘렀다. 다들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들 낳고 살다 보니 모일 때 마다 민석이 근황이 궁금하긴 했으나 그냥 우리 모두 그런 것 처럼 잘 살고 있겠거니 했다. 

중간에 민석이 어머님 통해서 연락처를 받아 한 동안 연락이 된 적이 있다. 대략 2015년 무렵이었는데 여전히 미국에 있고 시카고에 있다가 LA로 이사할 계획이라고 했고 건강이 좀 안 좋다 뭐 그런 통화했었다. 

그리고 2022년 여름에 결국 2018년 2월에 죽었다는 민석이 소식을 학교 '위령미사'소식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우리하고 연락이 끊긴지 3년 남짓이었다. 

어찌 어찌 수소문해서 미국에 민석이 형님과 연락이 되었고 사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차마 무슨 이유인지 어떤 사연인지 자세히 물어볼 형편은 아니었다. 우리 친구들은 본인의 처지를 비관한 외로움이나 우울증이 아니겠는가 하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같이 민석이가 안치되었다는 연천에 있는 성 아우구스띠노 수도회 납골당을 찾았다. 작은 칸에 납골도자기와 함께 민석이의 작은 사진이 있었는데 그 사진은 우리가 모두 아는 그 모습이었다. 아마도 1998년 혹은 늦어도 2000년대 초반 사진인듯하다. 민석이 형님과 통화하면서 안쓰러움과 나의 무관심에 대한 자책으로 한바탕 서럽게 울고 나서 그랬는지 납골당은 덤덤하게 받아들였졌다. 

다녀와서 우리는 저녁에 모여 술잔을 나눴고 기도했다. 더러는 눈시울을 붉혔으나 서로를 격려했고 또 이내 웃었다. 잔인한 말이지만 '산 사람을 살아야 하는 것'이 또 하나의 진리일테니. 

사실 1990년 스물살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나 1998년 민석이가 미국에 갔으니 10년도 안되는 짧은 만남이었고 그 뒤로 2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여전히 민석이를 떠올리는 건 그 때 그 시절이 우리 모두에게도 가장 즐겁고 빛나던 시기였기 때문이리라. 납골당 옆에 놓인 민석이 사진처럼 기억의 가장 정점이었던 때에 만나 추억을 나눴던 친구였기 때문이리라. 

뜬금없이 보고싶을때가 있구나. 민석아. 

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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