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고 산책하러 나섰다. 우리 집에서 5km 남짓 떨어진 곳에 양산시립 박물관이 있는데, 그 박물관 뒤편에 신기산성로라는 산길이 나온다. 예전 몇 번 와 본 곳인데, 걷기에 좋다. 심하게 가파르지도 않고, 재밌게 굴곡진 길이다. 걷다 보면 중간중간에 커다란 고분군을 만난다는 점이 여느 산책길과 다르다. (고분의 주인은 그리 궁금해하지 않은 1인이다). 김해나 경주에서만 고분을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이런 한적한 장소에 올 수 있다는 게 참 만족스러웠다.
매화꽃 주변으로 여러 마리 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많은 꿀벌을 한 번에 본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없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꽃과 벌 사진을 찍는 나는 활짝 웃고 있다. 벌 날갯짓하는 윙윙 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였다. "얘들아, 반가워. 몇 년째 너희들이 사라진다는 소식에 안타깝고 걱정되었는데, 이렇게라도 보니 좋구나. 제발 잘 살아주길 바라."
매화도 찍고, 이름 모를 초록이들도 찍었다. 키 작고 노란 꽃이 있어 사진을 찍었는데, 검색해 보니 양지꽃이란다. 이렇게 또 새로운 꽃 이름을 기억한다. 아, 이 여유로움이 가슴 벅차게 행복하다. 3월 토요일 두 번을 출근했을 뿐인데, 쉬는 토요일이 참으로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난 과장도 심한 편이야)
길을 걷다 보니 물이 흐른다. 이 정도면 양산꼬리치레도롱뇽이 살까 궁금했다. 셋이 걷다 나 혼자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올라가 보기도 했다. 잠시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한참 걷다가 두 남자가 벤치에 앉아서 쉰다는데, 마침 그 장소 아래쪽에 자연스러운 커다란 웅덩이가 있다. '어? 이 웅덩이는 전에 본 기억이 없는데, 예전에도 있었나?' 호기심을 가지고 혼자 가서 살펴보았다.
음, 뭔가 익숙하다. 사송에 있는 내 담당 고리도롱뇽 모니터링 구역이랑 이 웅덩이랑 닮았다. 축축한 습지, 그리 깊지 않은 웅덩이, 골풀도 있고. 개구리알, 갓 부화한 올챙이들도 눈에 보인다. 음, 이 정도면 도롱뇽이 충분히 살 수도 있을 텐데 싶었다.
일단 웅덩이 가장자리를 눈으로 관찰했다. 살살 손으로 풀을 걷어보았는데 아이코! 있구나! 도롱뇽 알이 있었다. 하하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알 한 덩이를 보고 나니 그 뒤부터는 눈에 잘 보인다. 눈에 덜 띄게 숨어있는 알도 있고, 웅덩이 물 안에도 있다. 대개가 낳은 지 2~3주는 되어 보인다. 내가 확인한 것만 열 쌍이 넘는다. 최소한 암수 도롱뇽이 스무 마리 이상 다녀갔다는 뜻이다. 살짝 보고 나서는 나뭇잎으로 살포시 덮어주었다. 웅덩이 속에 내 눈에 띄지 않은 알이 더 많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에게는 그저 웅덩이일 뿐이지만 여기에는 올챙이, 도롱뇽을 비롯하여 생명이 살아가고 있는 아주 소중한 터전이다.
도롱뇽 알을 찾고 나서 이 알이 고리도롱뇽의 알인가 하며 순간 궁금했다(진짜 알고 싶다면 도롱뇽 사체로 DNA 검사를 해야 한다). 멸종 위기 야생생물 2급인 고리도롱뇽을 사송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본 건가 했다. 고리도롱뇽을 모니터링 중이라 애착이 가는 건 사실이지만, 고리도롱뇽만 소중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 웅덩이 속 올챙이, 도롱뇽 모두 모두 잘 크길 바라는 마음이다.
웅덩이 주변에서 머문 시간은 고요했다. 두 남자와 동행했지만 나 혼자 있었고, 벤치에 앉아 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에게 방해되지 않았다. 3월 한낮에 부는 바람에는 따뜻한 온기가 묻어있었다. 이렇게 행복한 시간이라니, 여기 또 오고 싶다. 부화는 잘했는지 다음에는 유생 도롱뇽도 꼭 만나고 싶다.
상상을 해 본다. 만약 이 커다란 웅덩이가 사라진다면 여기에 있는 생명들은 어떻게 될까? 만약 양산시에서 여기에 골프장을 건설하는 사업을 승인했다면 여기는 한순간에 사라지는 건가?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민원을 넣는다고 해결이 될까? 환경단체와 함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될 것 같다. '만약'이라고 한 생각인데도 순간 아찔하다.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다. 거제시에 있는 노자산에 산을 깎아 77만 그루의 아름드리나무를 베어내고 골프장을 만들려고 한다. 거제뿐만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서도 산에 골프장을 만든다고 그야말로 난리이다. 다들 골프장 건설에 이성을 잃었다. 숲은 원래 소중하다. 천연기념물, 법정 보호종이 살아서가 아니라 그저 숲 자체로 소중하다. 기후 위기 시대에 더 큰 의미를 갖는 숲을 베고, 골프장을 만든다니 어리석다. 이윤에 눈먼 사업가가 골프장을 만들겠다고 허가를 요청하면 노자산을 지켜야 하니 딱 잘라 거절해야 할 거제시에서 관광산업 유치라는 명목으로 아주 적극적이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들. 1000억이 넘는 예산을 골프장 건설에 사용한다는 게 말이 되는 건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행정인가요?
노자산에는 팔색조, 긴꼬리딱새, 거제 외줄 달팽이, 대홍란, 삵, 기수갈고둥 등 멸종 위기종, 천연기념물 등이 서식하고 있다. 뉴스 영상에서 기자가 노자산에서 어렵지 않게 이 생명들을 만났다. 엉터리로 작성된 환경영향평가서를 바탕으로 사업이 승인되었다. 거제시 공무원이 말하길 원형 숲을 일부 보전하니, 야생생물이 (별 탈 없이-뉘앙스가 그랬다) 옮겨가 살 수 있을 거라고 한다. 너무 무성의한 답변에 할 말을 잃었다.
숲은 야생생물의 집이다. 터전인 곳이 하루아침에 없어졌는데 다른 곳으로 이동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야생동물한테 물어봤어요? (이건 분노가 치밀어 억지를 부리는 모양새다) 멸종 위기종인 대흥란도 다른 곳에 옮겨 놓으면 문제없이 잘 자랄 수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대흥란을 이식한 사례가 없다 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무도 모른다.
국토의 70%가 산이고,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산을 이용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말은 어느 정도는 맞다. 하지만 골프장 따위가 무엇이길래 멸종 위기종을 멸종으로 만들 위험을 감수하며 골프장을 건설해야 된다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숲을 베고 골프장을 만들면 누구에게 이득이 되나요? 골프장은 건설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숲이 없어지는 것은 큰일이다.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나무와 숲의 혜택은 열거하기에도 입 아프지만, 그저 자원으로만 인식하고 나무 베어서 그 땅을 활용하는 건 오히려 효과적인 일이라고 여긴다. 돈에 눈이 먼 개발업자에게는 베면 그만인 나무만 보인다. 그 숲에 기대어 사는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설령 보인다 해도 무시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숲에는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다양한 생명이 살아간다. 당장 내 눈에 띄지 않는다고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숲은 건강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큰 세상이다. 우리가 뭐라고 그 생태계를 함부로 망가뜨리려 하는지, 그것도 아주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다.
원주민은 나무 한 그루를 심을 때에도 7세대(210년) 후를 생각한다. 이것이 진정한 '지속가능성'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17개를 정하고, 달성 여부를 확인한다. 일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언제나 7세대 후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원주민을 알고 나니, 각 나라별로 자랑스럽게 발표할 그 무수한 수치들이 과연 진정으로 '지속 가능'을 위한 결과인지 의심이 든다. 그저 모두가 지속 가능을 생각하는 척만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7세대 후를 염두에 둔다면, 현재 실행 중인 많은 정책이나 우리의 삶의 방식은 당장에 '멈춤' 상태가 된다. 우리는 바로 다음 세대의 걱정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무엇이든 한 번 망쳐버리면 원래대로 복구하는 데는 곱절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 여태까지 우리가 망쳐놓은 지구는 어쩌면 7세대 후에나 원래의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집인 지구를 쉽게 오염시키고 망가뜨리며 살아간다. 지구에는 다양한 생명이 살아간다.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 예의 없음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인간 혼자만 잘 산다는 건 존재할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