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님이 제일 편하다.
오빠는 스물여섯까지였다. 회사에 입사해 학생 물이 덜 빠진 시기. 함께 창창한 앞날을 마주할 것만 같아 나 너 경계를 허물고 싶던 때. 쉽게 말을 놓고 언니, 오빠, 형, 동생 같은 다정한 호칭을 썼다. 그런 호칭을 쓰는 것도, 격 없는 사이가 되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부서에 배치되고 적응하다 보니 오빠라는 호칭은 좀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호칭이 굳어져 남자 동기들에게 여전히 오빠라고 부르곤 했지만, 그걸 들을 선배들이 신경 쓰였다. 남자들이 쓰는 '형'은 괜찮을 것 같은데 내가 부르는 '오빠'는 사석에서도 안 될 것 같았다. 회의자리나 선배들에게 남자 동기를 지칭할 때 꼭 직급을 붙여 불렀다. 아무래도 오빠라는 호칭으로 드러나고 구분되는, 어리고 여자인 내 위치를 가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위치에서 파생되는 편견이 있을 것도 같았다. 뭔가 의존적이고 도움을 구할 것 같은, 낮은 위치여서 이해하고 맞춰줄 것 같은. 오빠란 호칭은 쓸 때마다 그 편견에 갇히는 것 같았다.
오빠를 꺼리게 되니 더 이상 오빠가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서른 무렵이 되고 나니 오빠라는 호칭은 연인 사이에만 허락되는 것 같았다. 알던 오빠들은 결혼하며 연락이 끊기고, 회사 오빠들은 퇴사하며 멀어졌다. 남편은 동갑이고 나는 맏이라 오빠는 내 생활에서 멸종되었다.
언니는 굳이 거부하진 않았지만 사회생활하며 점차 어색해졌다. 일단 언니라고 부를 만큼 친한가, 친해질 수 있을까가 의문이다. 친분을 쌓으려면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친구도 잘 못 만나는 마당에 회사 밖 인연은 스쳐갈 게 분명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는 제안을 하기도 민망했다. 당신을 언니로 높이니 낮은 나를 동생으로 아껴달라는 어리광 혹은 항복 같았다. 강아지가 배를 벌러덩 드러내며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 같이.
상대가 제안하는 언니도 곤란했다. 퇴사하는 대리님이 이제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셨는데 우물쭈물했다. 공식적으로 대리님이 아니게 되었지만 갑자기 언니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언니-동생을 허락한 상대에게 우린 그 정도로 친밀해질 것 같지 않다고 직언할 순 없었다. 입에 붙은 호칭이 안 바뀐다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도 임신 중기에 퇴사했다. 직급은 가고 이름만 남은 자연인이 되었다. 곧 남편의 이직으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이사 갔다. 아기랑만 하루종일 있으려니 미쳐버릴 것 같았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아기 개월수가 비슷한 세 살 연상의 여자를 맘카페에서 알게 되었다. 배를 까뒤집어 재롱떠는 심정으로 언니라 해도 되겠냐 물었다. 그는 허락했고 온라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노력하고 자기 암시를 하면 언니-동생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 하고나 친구가 될 리 없다. 나를 질리게 하는 어떤 면들이 있어서 노력을 중단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육아 동지들을 만들어야 했다. 생협 소모임에 문을 두드렸다. 그곳은 서로 이름에 님을 붙여 불렀다. 부르기 좀 느끼했다. 들을 땐 과한 친절을 받는 듯 부담스러웠다. 점차 익숙해지자 이보다 간편할 수가 없다. 호칭이 호칭의 기능만 한다. 위아래도 없고 그에 수반되는 역할 수행이 없다. 그리고 다정하다. 나를 고유한 나로 인식하게 된다. 직장을 벗어나고 불릴 일이 없어져 바래지던 내 이름에 윤이 난다.
3년을 수평한 호칭에 익숙해지고 네덜란드로 넘어왔다. 교민을 찾으려면 많은 도시지만 굳이 찾진 않았다. 영어와 네덜란드 모두 호칭이 따로 없는 덕에 호칭 스트레스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차츰 한국 사람들과 연결되기 시작했다.
통성명을 하면 내가 먼저 OO님이라고 부른다. 한동안 돌아오는 호칭이 없다. 아무래도 내가 OO님을 처음 겪었을 때의 어색함을 느끼셨을 것 같다. 마음이 맞아 몇 번 더 만난 분들은 나이 질문을 한다. 한국어는 높임말과 낮춤말이 있고 나이 서열에 따라 결정되니 언어 사용법에 충실하려는 의도다.
나로서는 불길하다. 내가 어릴 때가 많고 그럼 언니라고 부르라는 호의어린 제안을 듣는데 언니라 부르는 순간 낮아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언니가 님일 때 처럼 존댓말을 쓰면 반말로 바뀌진 않을까 어미를 살피게 되고, 언니로 결정이 된 후 반말을 쓰면 가끔 하대받는 것 같았다. 내용이 그렇지 않더라도 형식이 내용을 규정했다.
나도 반말을 해볼까 생각해 봤지만 못하겠다. 이제 누구도 스물여섯 살 때 이전처럼 편하지 않다. 어린 시절엔 말랑말랑해서 막역하게 막 대하며 부대낄 수 있었다. 지금은 단단한 갑옷이 생긴 것 같다. 부대끼기엔 내 갑옷에 치이는 남의 갑옷이 상당히 거슬린다. 내가 거슬리니 남을 거슬리게 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예의와 거리를 갖춘 존댓말이 적합하다.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반말을 들으면 슬금슬금 피하게 된다. 존댓말을 써달라 하기 멋쩍고 반말을 계속 듣자니 하찮아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말의 형식이란 게 한 번 정해지면 되돌리기 어렵다. 그래서 최근 언니를 제안한 분께 언니란 말이 안 나온다며 줄곧 OO님이라고 부른다. 나이를 잊은 우정이 쌓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