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상품기획을 처음 시작할 때 기록을 위해 만든 블로그가 있다.
아직도 가끔 BM(Brand Manager) 직무를 희망하거나 상품기획에 대한 질문을 받곤 하는데,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안녕하세요. 화장품 상품기획 직무에 1달 정도 다니게 된 신입생입니다.
중소기업에 입사했는데요, 이 브랜드에 대한 네임 밸류도 거의 없는 상태입니다.
상품기획이라는 직무가 상품을 출시하기 위해서 자료 조사가 주된 일인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회사도 자료조사가 상품기획의 주된 일인지 궁금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계속 여기에 있는 게 맞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경력을 쌓아 더 큰 기업으로 이직을 하고 싶은데 물 경력만 될 거 같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BM으로 이직하려면 꼭 같은 직무로 경력을 쌓아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현직자님 꼭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질문을 받고 순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상품기획 업무를 처음 접한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좋아하는 화장품을 직접 개발할 수 있는 일
어딘가 모르게 멋져 보이는 일
상상만으로도 설레는 일
하지만 화장품 상품기획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만큼 화려하지 않다.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좋아하고 하고 싶었던 일이 매일 해야만 하는 반복적인 일이 되었을 때,
처음 느끼는 설렘이 사라지고 지루한 작업에 계속해서 직면하기 마련이다.
(2017년 기획 아이디어 노트)
화장품 상품기획은 새로운 화장품 개발하고 제품을 품평하는 일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자료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업하고, 누군가를 설득하고,
다양한 업체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의 비율이 더 높다.
어쩌면 좋아하는 일 4가지를 하기 위해서,
하기 싫은 일 6가지를 끈기 있게 해내야 하나의 제품이 겨우 탄생한다.
아무리 다양한 상품을 기획하더라도 모두 출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내가 개발한 제품이 회사에서 전폭적인 마케팅이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고, 기사 한 줄로만 출시를 알리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그마저도 소비자의 선택을 많이 받지 못하면 몇 개월 만에 세상에서 사라지는 제품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 당시에는 속상하고 자책하고 아쉬웠던 순간들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선택) 받는 제품이 내 손을 거쳐 나올 수 있었다.
나 또한 처음에는 막연히 능력 있는 상품기획자를 꿈꾸었다.
메이크업 자격증을 취득했고, 화장품 교육 강사 이력이 있고,
무엇보다 화장품을 좋아했기 때문에 상품기획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스물일곱, 그 당시 신입으로서 시작하기 늦은 나이였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으로 이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처음 경험한 상품 기획은 좋아하는 취향 하나만으로는 절대 결과를 만들 수 없는 일이었다.
전문적인 용어는 물론 처음 접하는 시즌별 업무 사이클, 카테고리별로 각기 다른 개발 방식,
상품 기획자의 한 끗(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키카피, 그리고 경험한만큼 컨트롤할 수 있는 제품 개발력까지
모든 게 새롭고 막막했다.
그래서 처음 1년 반이라는 (나에게는 가장 암흑 같았던) 시간 동안은 수많은 기획안을 쓰고, 자료 조사를 하고, 수정을 거듭했지만 내가 직접 기획하여 출시한 제품은 단 하나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들은 상사의 제품을 서포트를 하고,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 증정용 샘플 파우치의 뒷면 문안을 쓸 뿐이었다.
나의 기획안은 선택받지 못했고 같이 입사한 동료들과 비교를 당하며
상품기획자로서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랬다.
스스로를 위해서 퇴사를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상사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듣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버틸 수 있냐고.
그럼에도 나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
잘하고 싶은 일이었고, 제대로 해내고 싶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변화를 꿈꾼다면 본질에 집중하자"
상품 기획은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기획자가 본 것, 들은 것, 입은 것, 마신 것, 느낀 것들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회사 퇴근 후 뷰티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모든 감정들을 기록하고, 배우고 얻은 것들을 썼다.
평일 저녁에는 마케팅과 창업 동아리 모임에 나갔고, 감각을 키우기 위해 주말에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다니거나 색과 미술을 배우며 차근차근 나만의 오감 데이터를 쌓았다. (계산해보면 그 당시 연봉의 반 이상을 배우고 경험하는 것에 투자했다.)
4년 후
나는 동료들과 비교당하며 인정받지 못한 상품기획팀에서 가장 인정받은 상품기획자가 되었다.
이름 모를 제품에서 누구나 알 수 있는 유명한 제품을 출시했다.
6년 후
이제는 과정을 즐기게 되었다.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는 제품을 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화장품을 개발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부여할 수 있는 것을 고민하는 것에 더 의미를 둔다.
내가 어떤 고민을 가진 소비자를 분석했고, 어떤 해결책을 가진 제품을 만들었고,
이 제품을 통해서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일보다 내 선택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
상품 기획도 스스로 기획하고 개발한 제품이 출시되기까지의 임계점이 분명 있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과정이 일지도 모르는 일들이 어쩌면 임계점에 도달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일지 모른다.
지금 여기에서 이 물음에 답을 얻지 못한다면
어디를 가나 방황하고 절망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피하기보다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분명 끝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