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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크렁 May 17. 2022

첫인상이 의미 없는 이유

하나를 보면 열을 알까?

"MBTI가 I일 것 같아. 맞지?"


나에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한참 다음 와인병을 열심히 따고 있던 참이었다. 와인오프너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힘을 잔뜩 들여서 코르크를 따고 있는데 그가 물어봤다. 우리는 만난 지 한 시간째, 돌아가면서 서로 MBTI 맞추기를 하고 있었고 내 MBTI를 맞출 차례였나 보다. 나는 웃었다. 


"이 언니는 누가 봐도 E잖아"


그녀는 왜 내가 E 같아 보이는지 열심히 나 대신 설명하고 있었다. 첫 번째로 I는 이런 모임을 열 리가 없다는 것, 두 번째로는 낯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마지막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을 즐긴다는 것. 이런 성향들과 MBTI는 정말 관계가 있는 걸까 속으로 생각하면서 일단 그래 맞지, 라며 맞장구쳤다. 


할 이야기가 떨어지면 모임에서는 종종 서로에 대해 추리해보는 이미지 게임이 시작된다. MBTI는 뭐 단골 소재고, 술이 좀 들어가면 직업부터 나이, 영화 취향, 취미 등 각자의 정보들이 술술 나온다. 


만난 지 한 시간, 첫인상으로 나는 상대의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첫인상은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 혹시 34살 처음 봐?


자기소개에서 아무도 나이를 말하지 않은 날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나니, 슬슬 서로의 나이가 궁금해졌다. 말하는 내용이나 레퍼런스로 대충 서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우리 나이 맞춰볼까? 하고 누가 물꼬를 텄다. 


나는 사람 나이를 맞추는데 꽤 능한 편인데, 그날은 딱 보니 내가 딱 중간 정도인 것으로 보이길래 내 나이를 맞춰보라고 먼저 자원했다. 보통의 경우 모임에서 본인이 제일 나이가 많거나 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먼저 밝히기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모임 장소의 조명은 매우 어둡다. 주름이나 피부 상태로는 나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조건이다. 28살에서 32살 정도의 나이가 불렸고, 대충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89년생'이라고 나이를 밝혔다. 28살을 외쳤던 그는 소리를 지르더니 "89년생? 34살? 30대 중반?" 하며 계속해서 되물었다. 조금 과한 리액션인데, 생각하면서 살면서 34살 처음 보냐고 농을 던졌다. 내 나이를 듣고 저렇게 놀란 사람은 처음 봤다. 


요즘 세상에 얼굴을 보고 나이를 추정하는 일은 사실 바보 같은 것이다. 각종 시술과 관리는 물론, 식습관이나 수면 습관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로 인해 '얼굴 나이'는 같은 시간을 살아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또한 후드티와 같은 캐쥬얼한 복장을 입은 날엔 제 나이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기도, 정장이나 원피스를 입은 날에는 한 두살 많게 보기도 한다. 


게다가 보통 상대방의 나이를 추정할 때는 내가 생각한 것에서 한 2살 정도 내려서 말하는 것이 예의(?)라고 배웠다. 동안이 왜 칭찬인지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지만, 괜히 높게 불러서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첫인상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는 없다. 대신 스타일링을 통해 상대방이 추구하는 분위기 정도는 알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셔츠를 단추 끝까지 잠그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단정한 스타일로 보이고 싶은 것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사람이라면 다리가 길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첫인상은 복장에 좌우되는 것인가?




| 여러분~ 우리 이제~ 서로의 직업 맞추기를 해볼까?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글에 담을 수 없어서 매우 안타깝다. 해바라기를 닮은 그녀는 첫인사부터 활짝 웃는 모습이 반짝거렸고, 또랑또랑한 높은 목소리 톤을 가지고 있었으며 딕션이 매우 정확했다. 또한 모든 단어를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서로의 직업을 맞춰보자는 말이 나오자마자 그가 자신 있게 외쳤다. "선생님! 초등학교 선생님!" 다른 정답을 맞히려고 시도하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녀가 웃으면서 끄덕였다. "정답! 딩동댕~"


사람의 말투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다. '메라비언의 법칙'에 따르면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는 용모나 제스쳐 등 시각적인 부분이 55%, 억양이나 톤과 같은 청각적 요소가 38%, 말의 내용에는 고작 7% 정도가 영향을 끼친다고. 맞는 경우도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사실 같은 농담을 해도 더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고, 별 대단한 내용도 아닌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신뢰가 가는 사람도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말투를 통해 나의 이미지가 결정되는 것은 분명하다. 


내 MBTI를 I라고 추정한 사람은 살면서 단 한 명뿐이었는데, 그와 만난 날은 건물 관리인에게 사무실이 시끄럽다는 컴플레인이 들어왔다는 전화를 받은 날이었다. 평소보다 조용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고,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원래는 빵 터졌을 만한 웃긴 상황에서도 최대한 미소를 짓고 입을 가리고는 조용히 웃었다. 아마 그날은 I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말투는 이래서 좋다. 꾸며낼 수 있기 때문에, 노력으로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다. 톤과 억양이 38%나 영향을 준다는데, 이 정도면 내 이미지는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기업들의 브랜딩과 다를 바 없다. 첫인상이 브랜딩과 비슷하다면, 좋은 첫인상을 가지고 싶다는 말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나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다. 




| 가끔 집에서 요리를 하긴 해. 잘하진 않고. 


그는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이었다. 직장에 다니고 있는데 그날은 휴무라서 사진을 찍으러 다녀온 후 모임에 나왔다고 했다. 수더분한 복장에 까맣게 탄 피부가 그는 야외활동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다. 그의 첫인상은 그뿐이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의 취미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모임 멤버들에게 알렸다. 바로 여기저기서 사진 보여주면 안 되냐며 요청이 쇄도했고, 그는 흔쾌히 핸드폰을 열었다. 눈에 보여진 건 예상치 못한 수준급의 사진이었다. 잡지에 나올 법한 사진들이었다. "이정도면 돈 받고 찍어야 할 것 같은데"라고 누군가 말하니 그는 "받아. 100만 원대"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중에는 음식을 스타일링하여 찍은 사진들도 있었는데, 플레이팅과 스타일링이 거의 전문가 수준이었다. 그는 음식 사진이 찍고 싶어지면 가끔 요리를 한다고 했는데, 상세 페이지나 푸드 잡지에 나올 것 같은 사진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집이 가까워서 걸어가면 된다는 그는 마지막까지 남아 설거지와 뒷정리를 도와주고 갔다. 다음 주에는 제주도로 촬영하러 출장 간다고. 경비도 다 내주는 거냐는 부러움 섞인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세 시간 이후 그는 안정적인 직장과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버는 갓생러로 변해있었다. 게다가 뒷정리까지 도와주고 간 사람이니 인성도 좋을 것 아닌가. 


의외의 모습은 임팩트를 주고, 임팩트는 인상을 남긴다. 결국 첫인상이란 상대방과 보내는 시간 동안 내가 남긴 임팩트이다. 






촉이 발달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첫 인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은 겪어 봐야 안다는 말을 더 자주 듣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첫인상이 안 좋은 것이 꼭 나쁜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누군가에게 실망을 주는 것보다는, 의외의 호감을 주는 편이 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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