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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크렁 Aug 01. 2022

동성을 끌어당기는 사람들

인연이라고 하죠 

"남자들만 있어도 좋아. 재밌어"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그날 모임에 누가 나오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플랫폼을 통해서 모임 참가 신청을 받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참여하게 되는지 내가 사전에 알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다. 닉네임, 성별, 그리고 연락처. 성별의 경우 정보에 뜨는 사람이 있고 뜨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 여잔지 남잔지 알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여자들끼리만 모여도 너무 재밌겠다."


예전에 여자들만 가입할 수 있는 술 모임을 운영했던 적이 있는데, 이 사실을 말하면 모두의 반응이 한결같다. 실제로 모임 회원 수도 예상보다 빨리 늘었고, 후기와 참여도도 좋았기 때문에 운영이 수월했다. 지금은 운영하고 있지 않은데, 이유는 너무 높고 깊은 텐션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높은 확률로, 모임 날에는 한쪽 성별이 쏠리는 경우가 많다. 

이성 만남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주로 오는 것을 방지하고자 나는 성비를 맞추어 신청받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그 미묘한 남녀 사이 텐션을 잘 견디지 못하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하는 과정이 더 즐거워서다. 


두 번 이상 방문하시는 분들이 늘어나면서, 그 사람이 오는 날에는 특정 성별이 몰리는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남자 마그넷', '여자 마그넷'이라고 장난치며 놀리는데, 정말 신기할 정도로 동성을 끌어당기는 사람들이 있다. 


동성에게 인기 많은 사주팔자라도 정말 있는 것일까? 

인연은 내 의지로 맺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일까? 







| 왜 이렇게 남자가 많지? 이상한데?


그녀는 모임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나는 늦참러들을 배려하지 않는 호스트로, 7시가 되면 바로 와인을 따고 반말 모드를 켠다. 그래서 늦게 온 사람들은 초면에 다짜고짜 반말해야 하는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약간의 어색함에 곁들여진 적응 하려고 애쓰는 그 모습이 다들 매우 귀엽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남자가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다. 그날은 4명 중 2명이 남자였다. 많지 않은데? 라고 물음으로 대답하니 그녀는 자신이 여중, 여고, 여대를 나와 여초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자신이 어느 모임을 가던지 여자 비율이 압도적인데, 오늘은 참 이상하다고. 


사실 그날은 총 6명이 모였어야 하는데, 2명이 당일 불참을 했다. 취소한 내역을 확인하니 2명 다 남자였다. 당일 불참은 참가비 환불이 불가한 이유로 거의 드문 일인데, 확실히 그녀는 주변에 남자가 모이지 않는 기운을 가지고 있는게 분명했다. 


남자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내 번호를 따는 데 성공했다. 모임에 불참하는 사람이 생겨서 자리가 비는 날이면 그녀를 종종 초대하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녀는 여성분들이 많은 날에만 꼭 시간이 된다며 놀러오곤 한다. 




| 나는 모임 갈 때마다 예비군 간 줄 알았어 


그는 정반대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모임에 세 번쯤은 나온 듯한데, 그가 오는 날마다 남자들이 다수 참가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해서 모임에 나왔고, 항상 좋은 시간을 보내고 갔다. 아무리 그래도 모임에 오는 이유 중 하나로 이성을 만나기 위함이 아닐까 싶어서 물어본 적 있다. 매일 남자분들만 많이 오는데 괜찮냐고. 그는 특유의 훈훈한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이유가 없는 건 아니어서 사실 모임을 많이 다니는 편인데, 갈 때마다 남자밖에 없어서 이제는 뭐 익숙하다고. 저번 주말의 모임은 무려 남성 26명에 여성 2명이 참가해서 여성분이랑은 말도 못 섞었고, 남자들끼리 술을 진탕 먹으며 놀다 보니 예비군에라도 간 줄 알았다고. 


실제로 그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다. 여자분들을 대하는 태도나, 남자분들을 대하는 태도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환하게 웃었고, 친근하지만 선을 넘지 않는 농담을 던졌으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는 세심한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가 오는 날이면 나는 모임 시작 전부터 벌써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모임에 참여했던 날, 그는 내게 넌지시 말했다. 자신은 매번 남자분들이랑 재밌게 놀기는 하고, 번호나 명함도 꼬박꼬박 교환하는데 사실 그 이후로 연락을 서로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여자분들끼리는 친해지면 바로 친구가 되는 것 같은데, 남자들끼리 관계가 발전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서로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런 것 같은데, 당분간은 모임 활동을 그만두고 이성을 만나는 소개팅에 집중해보려 한다고. 나는 쿨하게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지만 매주 모임 날이면 그가 그리워질 것을 속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주로 남초 집단에 소속되어 있는 시간이 많았다. 

대학교를 미국에서 나왔는데, 같은 과 한국인 동기들이 전부 남자였다. 신입생 시절을 지나 2학년으로 올라가던 여름, 그들은 모두 한꺼번에 군대에 입대해버렸고 나는 동기를 잃어버려서 매우 외로웠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그전에도 나를 예의상 무리에 껴주기는 했지만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진정으로 그 무리에 속해있다고 느낀 적은 없다. 그들은 나를 제외하고 어울리는 시간들이 많았으며, 나에게 결코 공유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은 대충 눈치로 알고 있었다. 


여름 방학 때 나는 한 회계 법인에서 인턴을 했는데, 우리 팀 10명 중 여자는 내 사수와 나뿐이었다. 다행히도 사수와 성격이 매우 잘 맞았고,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워낙에 애써주신 덕분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사수와 나를 제외한 남자분들은 매일 구내식당에서 10분 만에 점심을 흡입하고는 단체로 우루루 당구를 치러가곤 했는데, 덕분에 나는 여유롭게 남은 점심시간을 혼자 커피를 마시며 보낼 수 있었다. 


다음 직장은 화장품 회사였는데, 90%의 직원이 여자였다. 웃긴 사실은, 그 10%의 남성이 전부 우리 팀이었다는 사실이다. 지독히도 여초인 회사에서 나는 굳이 남초 팀에 속해있었다. 이쯤 되니 공대도 아닌데 왜 남초에만 속하게 되는지 조금은 억울해졌다. 여자들끼리 밝은 분위기에서 일하는 모습이 부러웠고, 뭔가 내 쪽은 칙칙한데 저쪽은 화사해 보이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들이 많은 부서에 가면 정말이지 향기부터 달랐다. 나는 종종 다른 부서로 놀러 가서 시간을 떼우곤 했는데, 매일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함께하는 우리팀과 달리 그 팀은 점심시간마다 분위기 좋은 맛집과 카페를 함께 방문하는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이렇게 지내온 환경 덕분에 나는 지켜낸 인연이 별로 없다. 

사실 남자들 무리에서 여성으로 지내는 것은 가끔은 조금 외롭다. 그들과 잘 지내는 것과는 별개의 감정이다. 나는 그들과 생리통의 아픔을 나누지 않고, 내가 새로 산 옷이나 화장품이 얼마나 마음에 드는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팔짱을 끼거나 껴안는 스킨십을 좋아하고, 친해지면 함께 매운 음식과 소주를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성에게 굳이 먼저 제안하기는 망설여진다. 그들이 여자친구가 생기거나 결혼을 하게 되면 사적인 연락도 하지 않게 되고, 그러다 보니 그 때의 인연들은 그 시간속에만 간직하게 되었다. 


이때까지의 나에게 인연이란 주어지는 것이었고, 맺어지는 것이었다. 직장동료, 동기들을 내가 선택할 기회가 따로 주어진 적이 없었기에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것들에 충실히 살아왔다. 


21살 때 나는 한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상당히 진취적인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와 만나게 된 것도 그의 친구와 내 친구가 서로 친했기 때문인데, 나는 사실 그 정도의 접점으로 하루 만났던 사람에게는 큰 의미부여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더군다나 그때 우리는 각자 만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딱히 서로 연락할 이유도 없었다. 굳이. 


그런데도 그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서스럼없이 자주 나에게 연락했다. 내가 그를 만날 때마다 그는 다른 친구들과 함께 놀고 있었고, 내 친구들과 노는 자리에도 놀러 와서 즐겁게 어울리곤 했다. 이성이다 보니 서로 감정이 있어서 그렇게 지내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종종 받곤 했는데, 그와 내가 대화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본 친구들은 그와 나에게는 이성적 텐션이 전혀 없다는 것을 금세 눈치채곤 했다. 오히려 그는 몇번이나 내 친구와 갑자기 사귀게 되었다며 돌발적인 통보를 하곤 했다. 


나에게 모임을 열어보는 게 어떠냐며 제안한 것도 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예전부터 각종 모임을 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가 인연을 만들어가는 방법이었다. 그는 나에게 인연이란 내가 주도적으로 쟁취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주어지는 인연이란 너무나 그 범위가 작지 않냐며, 떠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채워지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모임을 열고 있다. 

사실 아직도 모임을 통해 꼭 지키고 싶은 소중한 인연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러기에 세 시간의 시간은 조금 짧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인연을 흘려보내는 내 성격을 완전히 고치치도 못했으니까.

 

그래도 모임을 통해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울 곳곳에 많이 생겼다. 

그들 인생의 한 부분에 내가 좋은 기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기분 좋기도 하고, 이렇게 계속 인연을 채워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일상으로 남길 수 있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을 마음 한구석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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