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에 대한 두려움, 선택에 대한 감당
출판사 선택 이야기
출판사 선정 시, 두 번째로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내가 책에 담을 메시지를 잘 담아내줄 것이냐였다. 이 원고의 제목이나 표지를 왜 이렇게밖에 못 살렸을까 싶은 책들이 있다. 반대로, 내용은 둘째 치고, 제목과 표지만으로도 매력이 느껴져 한번 읽어보고 싶게 만들어진 책들도 있다. 나는 두 번째를 원했다. '내 책'이라고 들고 있으면 자신감과 사랑이 느껴질 만한 결과물을. 그것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는 역시 해당 출판사의 기존 출간 리스트다. 제목을 이렇게 뽑았구나. 표지를 이렇게 선정했구나. 나와 결이 맞을수록 내 책도 내가 원하는 방향과 비슷하게 나올 거라 생각했다.
책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 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출판사는 거의 홍보를 못했다고 봐야 하니, 나에게 어떻게든 닿았던 책의 출판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 책장에 일단 들어와 있는 책들 중, 제목과 표지가 괜찮은 책들의 출판사를 추려 메일을 보냈다.
투고 직후 원고가 다르게 보이는 마법이 일어났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계속 쓰기: 나의 단어로》 의 데니 샤피로는 말한 바 있다. “항상 원고를 보내자마자 뭔가 바꾸고 싶은 부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원고를 한 번 공유하면, 원고는 전과 다르게 읽히기 시작한다. 발송 버튼을 누르거나 우편함에 봉투를 투입한 직후에 방금 그걸 보낸 사람이 되어 자기 원고를 다시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장 선호하는 출판사에 가장 먼저 투고하길 권하지 않는다. 투고한 후 새롭게 보이는 나의 원고를 더 수정하고 가다듬은 뒤 보내길 권한다. 나 또한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으로 처음에 투고했던 출판사들로부터는 아무 답장도 받지 못하였으나 양식을 다듬고 부족한 부분을 수정한 뒤 원고를 보낸 곳들로부터 출간 의사를 듣거나 정성 담긴 반려 메일이라도 받았다.
그러나, 너무 많은 곳에 투고하기를 권하지도 않는다. 선택지가 많아도 괴로울 수 있다. 보통 어떤 경우에 우리는 후회의 괴로움을 느끼는가? 나를 좋다고 했던 남자가 한 명이었다면 결혼생활이 괴로울 때 결혼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 될지언정 ‘이 사람이었기 때문에’라고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좋다고 했던 남자가 여럿이었음에도 이 남자를 선택했을 때 결혼생활이 괴롭다면 ‘다른 남자를 선택했다면 달랐을까?’라는 가정을 해 보며 가질 수 있었으나 갖지 못한 것, 누릴 수 있었으나 누리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통탄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도 출판도, 달콤함과 신속함이 선택의 기준이 되어선 안 될 텐데, 결혼도 출판도, 누군가는 달콤함과 신속함을 추구하며 하고 만다. 현재 계약을 맺은 출판사가 출간 의사를 밝혀왔었는데, 그 이후로 미팅이 잡힌다거나 뭔가 진행되는 연락을 받지 못하여 다른 곳에 투고를 더 했었다. 그중 한 곳으로부터 또다시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고, 거의 출간 계약까지 갔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서 먼저 의사를 밝혀준 곳으로부터도 다시 진행되는 연락을 받았고, 결국은 한 곳에 내가 반려 의사를 표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선택되지 못하고 답장받지 못해 느꼈던 거절감만큼이나 ‘후회할 것에 대한 두려움’은 끔찍했다. 어떤 곳을 선택하든 내가 잃는 것이 있을 것이고 얻지 못하는 게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따져볼 수 없는 것이 출판사 선택의 한계였다. 편집의 세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니 출판사와 편집자 선택에 따라 내 책이 어떻게까지 달라질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 시기 꿈에서 내 책은 어느 날은 산후우울증을 극복한 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이 되었다가, 산후우울증 대백과가 되었다가 했다. 장르 자체가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혼란스러움이자 선택의 갈등이었다.
한 가지 노래를 여러 가수가 불러보는 것처럼, 하나의 원고도 여러 출판사가 책으로 만들어보는 출판 이벤트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가지 책을 한 곳의 출판사가 잘 만들어도 팔리기 어려운 출판 시장이라 그런 생각은 사치겠지만, 반대로 출판 편집의 매력과 전문성을 드러내고 소비자들에게 비교 선택의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는 재미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출간 의사를 밝혀준 출판사의 대표님은 유명 출판사의 편집장까지 올랐다 개인적으로 출판사를 차리신 경력자셨다. 그분이 과거에 냈던 책을 들춰보았고, 작가의 말에 그분의 이름이 언급되기도 한 것을 보며 ‘나도 이렇게 이분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를 표하게 될까’하고 그려보며 사진까지 찍어보았다. ‘저희가 책은 더 잘 만드니까요’ 자신감 있는 그분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냥 찍어낼 것 같으면 요즘 부크크같은 전자출판도 많으니까요.’ 그랬다. 나는 전문 편집인이 필요한 거였다.
그러나 출간 예상 시기를 여쭙자 출간일까지 소요되는 기간이 너무 길었고, 수정 과정도 얼마나 거쳐야 할지 모른다고 답변 주셨다. 투고와 출판사 선택 과정에서부터 벌써 에너지를 너무 써 버린 나는, 앞으로 몇 개월간이나 이런 애매한 상황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출간일까지 몇 개월이 채 걸리지 않는 곳을 선택했다. ‘처음으로 내 원고를 알아봐 준 곳’이라는 낭만적인 이유를 혼자서 말해보며.
두 번째 출판사 대표님께서는 출간 시기가 너무 늦다는 나의 말에 장문의 메일을 주셨다. 책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왜 한 번에 금방 나올 수가 없는지. 그 메일을 읽으니 대표님이 더 멋져 보였지만 출판의 과정은 더 길게 다가와 중간에 무산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사이에 내 책과 비슷한 다른 책이 먼저 나와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커졌다. 고민 속에서 바라보니 해당 출판사 책의 제목이나 표지들도 더 모호하게 느껴져, 내 책도 모호하게 나오면 어쩌나, 편집의 손길이 너무 많이 뻗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결국은 다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편집 과정이 애매할 때마다, 자꾸 발견되는 오타를 볼 때마다, 출판사 계정에 내 책이 아닌 다른 책들의 홍보 피드가 주야장천 올라오는 것을 볼 때마다 생각해야 했다. 공들여 편집을 거치고 꼼꼼히 검수해 주실 것 같은 그 대표님과 작업했더라면 어땠을지에 대해서. 펴낸 뒤 오랜 책의 후기도 인터넷에서 가끔 검색해 보고, 꾸준히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려주신다는 그 대표님을. 소중한 시간을 내어 원고를 검토해 주시고 의견까지 주셨던 대표님께, 그저 죄송했다고 다시 말씀드리고 싶을 뿐이다.
다른 선택을 했었어야 했다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지금 출판사와 작업한 내 책의 제목이나 표지, 편집이 마음에 든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출간까지의 긴 기간을 버티지 못했을 수도, 중간에 들어오는 더 신속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담대함의 부족, 느긋함의 부족과 불안, 조급함은 내 삶에서 반복되는 주제이고, 반복되는 실수를 낳고 아쉬움을 남긴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책의 경우, 그것은 지면에 인쇄된 활자로 세상에 널리 퍼져 다시 그러모으거나 취소하기 어렵다는 특징이 있고, 그것 또한 결국, 조급하고 불안하고 위축된 초보작가가, 결국은 감당해야 할 몫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