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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연구소 잠시 Jun 04. 2023

출판이 처음이라 헤맸던 나, 그런 나를 먼저 위로하자

NP스러운 글

과거 혈액형처럼 자기소개란에 필수로 등장하기 시작한 MBTI에서 S와 N, J와 P의 차이를 알고 계신지? S는 정보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N은 사실적 너머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경향성이다. 예를 들어 S형에게 ‘시계’를 보면 떠오르는 것을 물으면 ‘몇 시인지’라고 답하지만, N형은 ‘앨리스’라고 답하여 S형들은 ‘갑자기?’라고 되물으며 눈을 크게 뜨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사과’에 대해 물으면 ‘빨갛고 동그랗다’라고 답하는 유형과 ‘뉴턴’이라고 답하는 것이 각각 어느 쪽인지는 추측이 될 것이다. J는 분명한 목적과 방향성이 있고, P는 딱히 그런 것이 없다. 체계적인 J와 달리 자율적이고 융통성이 있다. J는 어떤 물건이 늘 그 자리에 있길 원하는데 P는 손이 닿는 곳에 있으면 그만이다. J는 몇 시까지 어떤 일이 끝나 있기로 합의 되길 바라는데 P에겐 그 몇 시가 너무나 나중처럼 느껴지고 그 사이 어떤 다른 변수들이 생길지 알 수 없어 쉽사리 약속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NP의 강력한 결합이 초래하는 삶의 어려움들을 알고 계신지? NP인 나는 어떤 것을 검색하는 것보다 직관에 의존하고, 계획하기보다 즉흥적으로 실행하고, 일은 빠르게 처리하긴 하지만 뒤늦게 검토하지 못한 점이 발견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보다 마치 삶이라는 물결 속에 몸을 맡겨 주어지는 경험들을 맞닥뜨리며 의미를 찾아가며 산다. 명확한 분석과 신속한 판단을 놓치고 같이 흘러가는 와중, ‘어?’, ‘어?’, ‘어버버버’라고 내뱉으며...


이번에도 우리 둘째의 어린이집을 매우 직관적으로 알아보고 아이가 등원 시에 울 때마다, 그 이후에 펼쳐지는 온갖 상상 속에서 괴로워하는 중이다. 누군가 주변에서 ‘독감이 유행이라더라’라고 말하면 좀 더 주의깊게 들었어야 하는데 독감인가? 하고 5일에 걸쳐 나눠 먹어야 하는 약을 받아온 뒤 ‘수액을 맞춰야 하는 거구나’라고 뒤늦게 또 알기도 한다.     


내가 수련받고 있는 상담이론인 ‘게슈탈트’에서는 말한다. 모든 순간은 전체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어떤 일을 상담받고자 방문했을 때, 바로 그 문제가 상담실에서 드러난다, 라고 간단히 표현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늘 미루는 사람이 상담 약속에 늦는다던지, 어떤 것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이 상담사의 제안에도 거절하지 못하고 네네 하고 순응하는 모습을 보인다던지... 그러니 상담사는 늘 ‘지금-여기’에서 상담사와 내담자 사이 관계 속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잘 살펴야 한다. ‘지금 제가 이러이러하게 느껴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 대화가 이러이러하게 흘러가는 것 같은데... 저만의 느낌일까요?’ 좋아하는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말이 많아지며 타자가 빨라진다. 이상 흥미로운 상담실 안 이야기였다. 그런데 대체, 대체 대체 이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가? (지금 이 글도 P의 성향처럼 목적과 방향을 잃고 있음이 분명하다.)     

블로그에 출간의 과정을 담은 세 편의 글을 올렸다. 많은 분이 댓글을 달아주시며 도움이 된다는 피드백을 주시거나, 추가적인 질문을 달고 답을 얻어가셨다.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다. 나의 경우 주로 하지 못하는 경험이다. 나는 일을 저지르고 뒤늦게 검색하는 편이다. 내가 쓰는 글들은 나같은 사람들이 절대 볼 수 없는 글들이거나 스치듯이 피상적으로 지나가는 글들이다. 자세하게 정보를 훑지 않는다. 마치 새로운 경험이 손상되기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는가, 정보를 알아보면 좌절부터 할까봐 회피하는 것인가. 단지 MBTI의 유형으로만 설명되기 어려운 나의 현상일 것이다. 해외여행지에 가면서도 검색해보지 않고 갔다가 우연히 들른 괜찮은 곳에 대해 ‘운명이야!’라며 의미부여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즐겁게 의미부여하고 끝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그것은 20대의 홀몸이었을 때, 또는 그저 즐기고 돌아오면 되는 여행이었을 때나 해당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어린이집에 대해 그저 ‘경험이다’라고 의미부여를 하기엔 아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너무 가슴 아프다. (물론, 그 어린이집이 실제 그럴만한 곳이냐는 별개의 문제다. 더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뒤늦게 ‘이런 걸 더 알아봤어야 했나’, ‘다른 선택을 했어야 했나’라고 자책하는 과정이 가슴이 아픈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긴 글을 적으며 나는 일종의 변명을 하고 있고, 일종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다들 편집 과정에 대해 검색해 보시거나, 미리 알아 보시나요?’. ‘어디까지 아시나요?’ 나는...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다!      

출판사에서 내가 보낸 원고의 최종본에 대해 ‘피씨교 예시’라는 파일명으로 교정 예시를 보내왔다. 편집자님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였다. 편집자님은 친절하게 느껴졌고 달린 설명은 이해가 되는 부분이 많았다. ‘도치가 작가님 어투인 것으로 보이는데 너무 많으면 가독성이 떨어지므로 좀 줄일게요’, ‘지칭이 달라지는 부분 맞추겠습니다’, ‘맞춤법과 문장 호응은 국립국어원 대사전에 맞추어 수정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파일을 읽어보니 이건 내가 쓴 글이 아니었다. 맞춤법의 교정 외에 문장들이 불필요하게 여겨지는 부분까지 일일이 손보아져 있었다. 너무나 놀라고 당혹스러웠다. 무엇보다 화가 나고 두려웠다. 내 정체성을 잃는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화가 나도 되는지 의문스러웠다. 내가 무슨 대단한 작가라고. 문체가 중요한 소설도 아니고.    

  

내가 어떤 정보를 찾아보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인 거다. 선택하기 전, 진행하기 전이 아니라 선택하고 진행한 뒤 놀라고 당혹스러운 바로 그 순간. ‘이런 거였어?’하고. 주변에 책을 낸 분이 딱 한 분, 그 한 분이 마침 7권이나 책을 낸 분이었다. 친하지는 않지만 용기내 연락드렸다. 보통 어떤 편집의 과정을 거치셨는지, 수정이 많았는지. 어떤 곳은 전혀 손보지 않았는데 오히려 아쉬웠고, 어떤 곳은 윤뮨의 의견을 주셨는데 직접 하진 않았다. 그리고 편집자가 경험이 많고 의견이 있어야 그런 제안도 가능한 것 같더라라는 말씀을 주셨다. 다만 직접 윤문을 해서 주는 건... 하고 말씀을 생략하셨고 저자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니 적당히 손보아주길 부탁하는 건 어떤지 조언주셨다. 확실히 나의 담당 편집자는 경험이 많아 보였다. 의견이 확실했으니. 그래도 조언주신 분의 말씀처럼 내 글이 내 글이 아니게 되는 건 싫었다. 사실 내가 쓴 글의 감성적인 문체에도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짧고 명확한 글이 잘 쓴 글이라지만 나는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만연체를 좋아한다. 그래서 ‘편집자님의 의견에 동의하는데 다만 내 글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니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만 수정을 부탁드린다’라고 말씀드렸다.      


편집 과정 때 즐거운 순간도 있었다. 편집자와 내가 한 몸이 되어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내 글에 대해 이렇게나 자세히 읽고 또 궁금해 해 주는 이가 있을까? 게다가 출판사에서 투고 원고를 검토한 분들 이후로 내 첫 독자다. 그 분 역시 한 아이의 엄마로, 원고를 무척 공감하며 읽었다고 칭찬도 해 주신다. ‘이 부분은 이런 뜻일까요?’, ‘이 부분은 이렇게 하면 어떨까 싶은데 의견 주세요’. 의존적인 내게 편집 전문가에게 의존하여 내 글을 더 멋지게 다듬고 독자들에게 명확히 다가가게 한다는 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실수를 하고야 만다. 출판사에서는 갑자기 금요일에, ‘다음 주에 인쇄 예정이니 8-90% 완성되면 공유드리겠다’고 알려온다. 놀라서 되물으니 ‘곧 확인하실 수 있게 보내드리겠으니 월요일 오전까지 보내주시라’고 한다. 그게 금요일 오후 3시. 그럼 주말 내내 원고 확인에 공을 들여야 한다, ‘그래도 주말이라는 시간이 있다’라고 나를 다독였다. 6시 전에 메일이 올 줄 알았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다 퇴근 후 시각인데 미안하다며 8시가 넘어 문의하니 추가 수정사항이 생겨 마치면 보내주겠다고 하고 편안한 밤을 보내라고 한다. 그렇게 월요일 오후 2시에 최종본이 왔고, ‘내일 오전까지’ 피드백을 달라고 하신다. 6월은 내게 1년 중 가장 바쁜 달이다. 원래 주말 동안 원고를 손보고 보내라고 했던 월요일 오전에 원고를 보내면 월요일 밤에는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범벅이 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는가? 다시 궁금해지는 것이다. ‘저는 그렇게 촉박하게는 어렵겠어요. 시간을 더 주세요’라던지. ‘보내주신다고 한 기한에서 늦어졌으니 시간을 더 주세요’라던지. 그러나 상황에 나를 맞추고 말았다. 인쇄 일정이 잡혔다는데 나 때문에 번복이 되는 게 싫었다. N이고 P이고를 떠나 여기에서 내 또 하나의 주제가 나오지 않나 싶다. ‘나 때문에’. 미움받고 싶지 않고, 원망받고 싶지 않다. 민폐가 되고 싶지 않고,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러면 그냥, 조용히, 요청에 따른다. 집중력을 잃어 커피를 연신 마시고 조급한 마음에 가슴이 뛰어 제대로 검토가 되지 않더라도. ‘괜찮을 거야’라며 이상한 긍정을 이럴 때 부린다. 그런데... 한글파일로 받은 첫 교정본에 내 의견과 달리 수정된 부분들을 다시 수정하고 꼼꼼히 검토하여 오랜 시간을 들여 답신을 보냈는데 내가 수정했다는 것을 명시했어야 했던 걸까, 나는 그 파일이 그대로 사용될 줄 알았다. 그런데... 끝으로 받은 교정본에는 내가 바꿨던 부분이 바꾸기 전으로 그대로 들어간 것도 있었고 어떤 부분은 반영이 되고 알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당연히 내가 수정한 부분이 반영되었으리라 믿고 오탈자 위주로만 봤는데 거의 답장을 넘기기 직전에 발견하고 만 것이다. 장점이라면 장점인데 이럴 때 발휘되고마는 안타까운 특성은, 지금 보내겠다고 하고 말도 없이 다다음날 보내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약속은 잘 지킨다. 화요일 오전까지 보내기로 했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화요일 11시 59분까지는 보내는 것이다... 너무나 찝찝한 마음 속에, 시간을 더 달라 하지도 못하고 완전히 검토를 하지 못한 상태로 최종본을 넘기고야 말았다. 단지 ‘나 때문에 인쇄일을 조정할 순 없다’는 생각과 ‘다 잘 봐주셨을 거야, 괜찮을 거야’라는 안일한 믿음으로. 내 원고를 내가 최종적으로 꼼꼼히 보지 못했으니 대체 누굴 탓할까. 그러나 한편으론 씁쓸함이 들었다.     


내 첫 책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엄마가 되고 싶어 된 뒤 겪는 여러 가지 당혹스럽고 충격적인 부분들을 다뤘다. 출산 과정에서도 자세히 안내받지 못하고(물론 나도 미리 알아보지 않고) 통제감을 잃은 속에 경험했던 감정을 생생히 그렸다. 나의 편집자가, 나의 출판사가 그 글을 읽고 공감하여 원고를 채택해 주었다. 그러나 내 첫 책이 나오는 과정 또한 그렇게 안내 없이, ‘피씨교’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보내져서 ‘피씨교’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갑자기 인쇄일이 정해져서 재촉받는 속에 진행이 되었다. 그게 서운하고 씁쓸했다.

     

출판이라는 게 어떤 과정을 거쳐 진행되는지 메일로 자세히 알려주셨던, (사실은 그러니까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책이 나올 수 없다고 설득하려 하셨던) 다른 출판사의 대표님이 떠올랐다. 적어도 언제까지는 답신을 주겠다고 하시면 반드시 그 안에는 답신을 주셨던 프로페셔널한 모습도 이제 와 부각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다. 식장에 들어가버렸다. 전의 인연은 잊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도 이 선택을 했다. 그러니 무슨 검색이 필요하고 계획이 필요할까? 어떤 일을 바로잡을 수 있는 시간이 있음에도 내 주장을 하지 못하는데. 이 천치, 이 등신...! 가끔은 나를 그렇게 부르며 가슴과 머리를 쾅쾅 치기도 한다.     

그런데 엄마가 되는 과정을 아무리 알고 시작한 사람이라도 당황하더라. 육아라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시작했음에도 실제 겪는 육아의 어려움이 줄어들진 않더라. 책을 내는 과정도, 얼마나 더 알았다고 얼마나 달라졌을까, 위로라기보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처음’은 어렵고 낯설고 미숙하다고. 내가 어딘가에서 이 이야길 했더니 그 분이 그 말에 위로받았다. ‘아... 세상의 모든 처음은...!’ 알고 보니 그분도 처음 경험한 어떤 일로 힘들고 혼란스러운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 실수투성이에, 뒤늦게 깨닫기로는 일등인 나도 이렇게 실수로 얻은 깨달음으로 사람들을 위로한다. 그러나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등신에 천치라고 자신을 마구 두드릴 일이 아니라... 네가 그 과정 속에서 얼마나 헷갈리고 당혹스럽고 난처했느냐고, 첫 책을 그렇게 얼렁뚱땅 내게 되어 얼마나 아쉬웠느냐고, 소중한 이야기를 그렇게 선보이게 되어 속상하진 않았느냐고... 나를 먼저 위로할 일이다. 어찌 세상을 살아본 사람처럼 살겠느냐고. 어찌 그것을 처음 하는 네 경험이라 하겠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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