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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Aug 16. 2022

혼돈에서 시작된 공포

프랑켄슈타인 - 메리 셸리


 녹색 머리에 못이 박힌 엉성한 괴물의 얼굴이 떠오르는 『프랑켄슈타인』은 킬링타임용 B급 호러 소설이라는 예상을 벗어나 생각보다 묵직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의 창조에 대한 욕망, 무책임함, 원치 않은 탄생과 고독, 그리고 끝없는 복수. 이 끊임없는 굴레 속에서 무엇이 정의이고 부정의 인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생각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며 소용돌이쳤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에 의한 공포가 아닌 괴물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처럼 정답 없는 생각의 미로에 갇힌 나 자신에 대한 공포로 점철된 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발생과 생명의 근원에 집착하던 프랑켄슈타인은 금기를 거스르고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해낸다.(편의상 이 생명체를 앞으로 ‘그것’이라고 부르겠다. 괴물이라 부르기엔 마음이 아프기에.) 자신이 창조해냈음에도 끔찍한 외형의 그것이 마침내 눈을 뜨자 프랑켄슈타인은 공포에 사로잡혀 냅다 줄행랑을 치는데, 목적 없는 광기가 부른 참사란 바로 이런 것일까? 그저 생명의 근원에 대한 맹목적 탐구로 대책 없이 그것을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을 책임질 계획도, 생각도, 용기도 없었음을 피조물이 완성된 후에야 깨닫는다. 그의 어리석음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또 한편으론 어리석음의 대가로 가족들을 잃고 끝없는 절망에 빠진 그를 보면 그의 한심함에 혀를 끌끌 차다가도 쇠약해진 그의 몸을 절망의 굴레로부터 빠져나오도록 도와주고 싶은 욕구가 차오른다. 하지만 이런 욕구도 그다지 오래가진 않았다. 그것이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지금껏 자신이 겪어온 지독한 고독과 상처를 고백하며 더 이상 외롭지 않게 자신과 같은 존재를 다시 한번 만들어달라며 프랑켄슈타인을 설득할 땐 그것이 끔찍한 살인마라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마음속으로 그것을 고독하게 만든 프랑켄슈타인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가 그것에 완전히 공감한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을 볼 때면 생명을 낳아놓고 전혀 부모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는 비정한 인간들이 생각나 마음이 아픈 한편, 불우했던 어린 시절이나 사회에 불만을 품어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며 억울함을 토하는 범죄자들이 생각나 역겨움에 몸서리쳐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인물 하나에도 온전히 마음을 줄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안과 초조함 속에 갇혀있었다.




 결국 프랑켄슈타인은 온 가족이 몰살당한 후에야 그것과 대면하고자 마음먹는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인 프랑켄슈타인이 쫓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고 결국 그는 복수심만 남긴 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이런 프랑켄슈타인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그것은 복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만든 창조주를 잃자 허망함에 자살을 암시하며 사라진다. ‘너네 둘 다 꼭 그렇게 했어야 했니…?’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결말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끝까지 역겹고 끔찍했지만 나는 쉽사리 그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었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나중에야 후회를 거듭한다. 부정적 감정에 잠식된 채 일을 저지른 후에야 내가 저지른 행동의 결과를 이성적으로 깨닫게 된다. 후회와 깨달음의 크기와 방향은 프랑켄슈타인과 그것과는 다르지만 내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복하는 일들이다. 그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과연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답도 모르면서 프랑켄슈타인과 그것을 비난할 자격이 내게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한때는 덕을 쌓고 명예를 얻고 즐거움을 누리는 꿈을 꾸며 마음을 달랬다. 나의 겉모습을 뛰어넘어 훌륭한 자질을 품기도 했어. 영광과 헌신이라는 고귀한 이상에 젖기도 했고. 하지만 악은 나를 가장 비천한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추락시켰어. 그 어떤 범죄나 악행, 불행도 나의 것에 견줄 수 없다. 내가 저지른 무시무시한 행동을 하나하나 돌아보면 나도 한때는 선의 위엄과 아름다움에 취해 숭고하고 탁월한 이상에 젖어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도 하지. 타락한 천사는 사악한 악마가 되는 법. 그러나 신과 인간의 적인 타락 천사에게도 외로움을 나눌 친구가 있었지만 나에겐 아무도 없다. (p314)




 『프랑켄슈타인』을 읽으면서 최근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된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떠올랐다. 『침묵의 봄』은 1960년대에 쓰인 책으로, 당시 무분별한 살충제 사용으로 인한 환경 오염에 대한 레이첼 카슨의 고발이 담긴 책이다. 당시 우리 인류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의 과학적 발전의 한 가운데에 놓여 스스로가 무엇을 창조해 내는지 제대로 깨달을 시간을 갖지 못한 채 끊임없이 새로운 화학 물질들을 창조해냈고 이를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카슨은 살충제의 희생양으로 자연과 인간, 우리 자신을 꼽으며 인류의 길 잃은 과학적 성취를 비판했다. 1800년대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을 파멸할 그것을 창조했고 1900년대의 인류는 해충 박멸을 위해 살충제를 무분별하게 사용하다 익충과 새, 그리고 인간 스스로에게 해를 가했다. 현대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양의 온실가스를 생산하여 이제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기후 위기를 실시간으로 맞닥뜨리고 있다. 전에 분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고 인간은 학습 능력이 있는, 개선의 여지가 있는 동물이라며 나름 희망적인 글을 발행했었는데…. 최근에 연달아 읽은 『프랑켄슈타인』과 『침묵의 봄』은 어쩐지 인간은 가망이 없는 생명체가 아닐까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이 들게 만든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목적 없는 광기는 프랑켄슈타인에 국한된 것이 아닌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어리석음은 아닐까?




 오래간만에 머리 좀 식힐 겸 가벼운 마음으로 고전 공포 소설을 고른 것인데, 오히려 머리가 복잡해지다 못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프랑켄슈타인』은 내게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인간이 창조하고, 욕망하고, 회피하고, 분노하게 만드는지, 그 근원은 대체 무엇인지.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월턴이 프랑켄슈타인에게 그것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묻자 프랑켄슈타인은 격노하며 절대 함구한 것처럼 나의 의문에 대한 답도 누군가에게서 쉽사리 들을 순 없겠지. 복잡한 마음으로 책을 덮었지만 뜻밖의 깨달음도 있었다. 200년도 더 된 책이 나에게 이런 혼돈을 주는 것을 보면 우리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지, 그 답만큼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프랑켄슈타인> 200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가장  이유는 바로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자신이 투사된 작품 속의 인물들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누구나  번쯤은 어리석은 욕망이나 야망에 휘둘렸을 것이고, 크고 작은 일로 가책이나 후회에 시달려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사회적 고립을 두려워한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보다  ‘공포스러운일이 있을까? 1831 실명으로 다시 한번 자신의 “오싹한 이야기 세상에 내보내며 성공을 기원했던 작가는 과연  이갸기가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남는다는 것을 알았을가? 파란만장했던 삶의 경험을 인간 본성에 관한 깊은 통찰의 이야기로 바꿔 인류에게 전한 메리 리는 결국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의 좌절된 야망을 성취한 셈이다. (박아람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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