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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비 May 22. 2022

여자의 일생은 끊이지 않는 고통의 연속

파친코 - 이민진

 소설을 읽을 때 주인공의 인생이 너무 기구하거나 다사다난하면 몰입도가 떨어진다. 상상 속 인물이라 해도 이건 너무 말도 안 되게 이것저것 다 때려 넣은 거 아닌가란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현실과 동떨어진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면 아무리 다시 몰입하여 읽으려 노력해도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정말 “이야기”로만 느껴지기에. 파친코 속 “선자”의 인생은 참으로 기구하다. 기구하다라는 말로도 부족한 고달픈 인생이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은 멀고 먼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나와 우리의 어머니 세대, 더 나아가 한국 여성 모두의 이야기이기에 마음으로 읽지 않을 수 없었다.





 파친코는 선자의 엄마, 선자, 선자의 자식과 손자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영도”라는 부산의 작은 섬에서 시작된다. 영도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둔 “선자”는 장을 보러 나갔다가 새로운 생선 중매상 “고한수”와 만나게 된다. 고한수는 선자의 엄마와 동갑인 말 그대로 엄마, 아빠뻘 남자이지만 부끄럼도 없이 선자에게 접근한다. 애써 그를 모른체하던 선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한수의 도움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와 가까워진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고한수와의 밀회를 가지던 선자는 결국 그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순수한 선자는 고한수와의 결혼을 꿈꾸었지만 충격적이게도 한수는 이미 아내와 세 명의 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 그는 결혼은 할 수 없지만 선자와 아이에게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며 자신의 첩이 되어달라 말하지만 선자는 이별을 선택한다. 그러던 중 선자네 하숙집에 결핵으로 생사를 오가던 “이삭”이 찾아오고 죽을 고비를 겪던 그를 선자의 엄마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여 이삭은 건강을 회복한다. 선자의 처지를 들은 이삭은 두 모녀에게 은혜를 갚고자 선자에게 청혼을 한다. 아직 마음 한편에 고한수를 담고 있던 선자이지만 자신의 인생과 아이를 위해 선자는 이삭과 결혼하여 이삭의 형 내외가 살고 있는 오사카로 새 인생을 떠나게 된다. 이제 행복할 일만 남았나 싶었지만 선자의 인생에는 가난, 전쟁 등 갖은 고난과 역경이 잊을만하면 치닫고 또 치달았다. 이 와중에 고한수와의 질긴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를 연 역시 잊을만하면 한 번씩 선자의 인생을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뒤엎어버린다. 가족들로부터 삶의 희망과 행복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론 가족들로부터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는 선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시 가족들과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선자의 이야기이다.












 파친코의 시대적 배경은 1910년부터 1989년까지이기에 한국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제강점기, 2차 세계대전, 근대화 등 격변의 시기와 갈 곳 잃은 재일 교포들의 이야기까지 한국 역사의 슬픔이 고루 담겨있다. 그 많은 슬픔들 중 나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만든 건 여성들의 슬픔이다. 어린 선자를 성추행하던 일본 학생들, 남자가 첩을 두는 건 괜찮지만 그 첩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세상, 대신 사채 빚을 갚아줬더니 자존심이 잔뜩 상해 부랄도 없는 놈 취급받게 생겼다며 선자와 경희를 비난하던 요셉, 야쿠자의 피를 물려줬다며 선자를 비난하고 끝내 선자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노아 등…. 고달픈 삶의 무게는 마치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짐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조선 여성들에게 부과되지만 선자도 나도 의문스럽다. 그녀들의 인생은 왜 이렇게 고생스러운 걸까.

“당연히 그렇겠지! 선자야, 여자의 일생은 일이 끊이지 않는 고통스러운 삶이데이. 고통스럽고 또 고통스러운 게 여자의 인생 아이겠나. 니도 각오하는 게 좋을 끼다. 인자 니도 여자가 되었으니까네 이건 꼭 알아둬야 한데이. 여자의 인생은 남편한테 달려 있다, 이 말이라. 좋은 남자를 만나면 근사한 삶을 살게 되고, 나쁜 남자를 만나면 저주받은 인생이 시작되는 거레이. 그래도 우야든동 여자의 인생이 고통스러운 건 마찬가지다 아이가. 항상 일을 해야 한데이. 가난한 여자를 돌봐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이가. 기댈 건 우리 자신뿐이다 이기라.” (파친코1, p48)
“고생길이지.” 양진이 큰 소리로 말했다. “여자의 운명은 고생길을 걷는 거지.” “네, 고생길이죠.” 경희가 고생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자는 평생 동안 다른 여자들한테서 여자는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여자는 어린 소녀로, 아내로, 엄마로 고생하다가 죽는다는 소리였다. 고생이라, 선자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신물이 났다. 그 외에는 다른 게 없단 말인가? 선자는 노아에게 더 나은 삶을 선사해주기 위해서 고생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자신이 물처럼 들이마셨던 수치를 견뎌내도록 가르쳤어야 했을까? 결국 노아는 자신의 출생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아들에게 고생이 닥칠 거라고 말해주지 않는 게 엄마들의 잘못일까? (파친코2, p178)





 선자는 계속해서 운명의 장난과도 같은 아이러니를 맞닥뜨린다. 고한수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고한수의 첩이 되든 혼자 아이를 키우든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세상의 손가락질을 면할 수 없다. 집안의 가장인 요셉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경희와 선자는 가계가 기우는 상황 속에서 생계에 뛰어들자니 요셉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고, 그렇다고 그를 마냥 따르기엔 가족들이 전부 길바닥에 나앉을 처지에 처한다. 노아의 학업을 위해선 고한수의 금전적 도움이 필요하지만 이삭을 닮아 올곧게 자란 노아가 자신의 출생 비밀을 감당하지 못할까 우려된 선자는 고한수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선자의 대부분의 고통은 이런 아이러니에서 비롯된다. 여성에게 부과된 사회적 규범과 구속은 각박한 현실로부터 그녀들을 보호해 주지도 못하면서 이를 어길 시엔 비난의 돌을 던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선자는 나름의 최선을 선택하지만 때때로 선택의 후폭풍을 맞닥뜨린다. 파친코를 읽으면서 내내 선자의 깊은 고뇌와 갈등을 함께 겪어서인지 그녀의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에게도 너무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선자가 겪은 고통 중 특히 선자가 사랑했던 두 남자의 죽음이 가장 충격적이라 작가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이삭 하나만 믿고 건너온 오사카인데, 그런 이삭은 정작 정당한 이유 하나 없이 그저 신사 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명목하에 2년간 옥살이를 하다 선자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일찍 눈을 감는다. 과부가 된 선자는 자식들만 바라보며 그 모진 세월을 견뎠지만 첫째 노아는 선자의 오래전 과오를 받아들이지 못해 끝내 자살을 한다. 선자는 어떻게 이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견뎌냈을까. 선자의 인생을 너무나도 가혹하게 그려냈기에 작가가 원망스러웠지만 이런 원망은 작가의 말을 읽으면서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민진 작가는 근 30년간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실제 일본에 사는 한국인들의 고통을 선자와 선자의 가족들로 담아낸 것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나의 온 마음을 다해 이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파친코는 결국 선자라는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에 고통받은 우리 한국인, 한국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물론 마음으로 읽지 못한 부분도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하나는 모자수의 애인의 딸로 매우 종잡을 수 없는 아이이다. 어린 나이에 임신하여 결국 낙태 수술을 했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엄마의 애인인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을 유혹한다.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지는데 사실 하나가 솔로몬을 사랑하는 게 맞는지 읽는 내내 의심스러웠다. 하나는 솔로몬과의 성관계 중 뜬금없이 돈을 요구하더니 성관계 때마다 지속적으로 솔로몬에게 돈을 요구한다. 솔로몬도 돈이 왜 필요한지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한데 깊이 알려 하지 않고 순순히 돈을 내어준다. 말로는 사랑이라 하지만 그 둘의 관계가 성매매와 다를 게 뭔지…. 불편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후에 하나는 돌연 자취를 감추더니 자신의 연락처는 알려주지 않으며 자기가 연락하고 싶을 때에만 일방적으로 솔로몬을 찾는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은 고한수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다. 잔뜩 몰입해서 읽다가 하나와 솔로몬의 에피소드를 만났을 때 읽는 내내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가 왜 필요한지 의도를 전혀 알 수 없어 잠시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다시 마음으로 읽은 파친코로 넘어와 보자. 이야기는 아쉽게도, 또 한편으론 그럴 수밖에 없게도 해피 엔딩을 맞이하지 않는다. 선자의 손자 “솔로몬”은 아버지의 파친코 사업을 물려받기로 결정하는데, 이는 재일 교포에 대한 차별이 아직까지도 일본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음을 뜻한다. 차별과 멸시의 문턱을 넘지 못한 수많은 재일 교포들은 생계를 위해 파친코 사업에 뛰어들었다. 날 때부터 일본에서 살았고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솔로몬이지만 그 역시 재일 교포라는 딱지를 벗지 못한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그는 결국 상사에게 이용만 당하고 직장에서 해고를 당한다. 선자의 아들 “모자수”는 파친코 사업을 부끄러워하진 않지만 떳떳해하지도 못하기에 자신과 같은 길을 선택하려는 아들을 만류한다. 삶의 아이러니는 선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아들과 손자에게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재일 교포들이 처한 냉혹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결말이라 생각한다.





 아무래도 애플TV에서 드라마로 제작하면서 원작 소설이 화제가 되었기에 드라마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각설하고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다! 고한수 역할에 이민호라는 미남 배우가 캐스팅되었고 책과는 달리 드라마에선 고한수에게도 아픈 배경 서사를 만들어 주어 드라마만 본 사람들은 자칫 고한수를 매력적인 “나쁜 남자”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어보면 고한수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선자에게 욕정을 품는 추저분한 인간이며 자신의 본처가 죽으면 선자가 당연히 자신과 재혼해 줄 거라 착각하는 매우 오만한 남자다. 눈치챘겠지만 나는 고한수가 너무나도 싫다. 그의 일방적인 사랑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불편하기 짝이 없다. 집착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전형적인 모습의 산물이 고한수가 아닐까.











 간략하게 책에 대한 흥미만 띄워주며 글을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쓰다 보니 또 이렇게 글이 길어졌다. 그만큼 파친코를 읽고 느끼는 바가 많았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선자의 고통스러운 삶을 공유하고 싶었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담은 이야기가 드물게 외국에서 화제가 되어 드라마로까지 제작되었다. K국뽕을 차치하고라도 역사는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하기에 많은 한국인들이 이 책을 읽어보길 바란다. 두꺼운 두 권의 책을 모두 함축하는 한 문장을 끝으로 지루한 감상평을 이만 마치겠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파친코1,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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