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휴가 1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간다. 휴가를 가기 전 마쳐야 하는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 중 하나는 계획 세우기다. 주말, 특히 일요일 오후에 느긋하게 앉아 일주일 치, 혹은 이주일 치의 계획을 가혹하게 짜 놓으면 스트레스가 풀린다. 계획은 잘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하는 선에서 짠다. 계획들은 보통 이틀에서 삼일에 걸쳐 분산된다. 예를들어 해야 할 일이 1부터 10까지 있다면 월요일 1,2,3, 화요일 2,3,4, 수요일 3,4,5 이런 식이다. 산술적으로는 월요일 1, 화요일 2, 수요일 3, 이라고 적는 것과 동일한 계획일 테지만 전자와 같은 뭉테기 계획 방식에는 어쩌면 하루에 세가지 일을 모두 다 해치워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더불어 하루에 아무것도 못했을지라도 다가오는 어느 날 그 일들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게 계획을 짜다보면 산더미 퍼즐 조각처럼 쌓여 있던 해야 할 일 목록들이 꾸역꾸역 자리를 찾아가고 군데군데 완성본의 그림이 그려지면서 마음이 한결 놓인다.
이번 휴가는 1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가기로 했다. 한국으로 가는 유일한 이유는 엄마와 아빠를 만나기 위함이다. 장기간 이어진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여행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며 급등한 한국발 비행기 티켓 가격이 아니었다면 아마 한국으로 휴가를 가진 않았을 테다. 부모님을 뉴욕으로 초대하든지 아니면 하와이나 유럽에서 만나는 편을 선택했을 것이다. 한국은 휴가를 보내기에 좋은 곳은 아니다. 난 다시 일을 하고 싶어질 정도로 무료하고 안락하고 느릿한 시간을 휴가로 보내고 싶다. 가끔씩 그간 해왔던 일들도 정리하고 앞으로 할 일들도 생각하며 연 단위의 계획을 짜는 일을 하고 싶다. 무리해 보이지만 가능할 법도 한 장기적인 계획을 두어가지 떠올리며 바쁘게 사느라 잊어버린 설렘을 떠올리는 것이 즐거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 가면 시간이 쏜살같이 휘뚜루마뚜루 지나간다.
엄마는 한국에 왔을 때 대장 내시경을 하라며 극성을 부린다. 미국에서도 많이 비싸지 않다고 설득을 해도 엄마는 자기가 아는 의사인데 누구보다도 꼼꼼하게 잘한다며 이번 기회에 꼭 하고 가라며 안달이다. 마지못해 알겠다고 했다. 한국에 가자마자 할 일이 하루 금식하고 내시경을 받는 일이 되게 생겼다. 친구들도 만나야 한다. 최소한으로 만나려고 하지만 아무리 못해도 세 팀은 만나야 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에는 추석이 꼈다. 우리 집 친척들도 만나야 하고 반려인 가족의 가족들도 만나야 한다. 가봐야 할 음식점들도 한가득이다. 이왕 한국 가는 거 밥이라도 잘 먹어야 하지 하고 틈틈이 구글맵에 가고 싶은 음식점 저장을 하다 보니 6개월을 머물러도 다 못 갈 만큼의 목록이 쌓였다.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휴가의 목적이 쉼이라면 한국은 안될 말이다. 그렇지만 일 하느라 그동안 못한 것들을 하는 것이라면 한국 외엔 떠올릴 장소가 없다. 가족들과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수다를 떠는 것은 내가 미국을 오면서 잃어버린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이다. 어쩌면 유일한 것이다.
지난주 금요일 오후는 한가로웠다.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모처럼 행복하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풍요로운 시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아빠가 살아 있고 반려인과 친구들이 살아 있고 함께 나눌 이야기들이 있고, 당장 해야 할 일들과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모두 언젠가 사라질 존재들이지만 지금은 모두 내게 있다.
엄마와 통화 도중 작은 이모가 아무래도 치매에 걸린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작은 이모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던 때 작은 이모가 집 근처에 있다고 해서 인사만 할 겸 지하철 역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다. 아주 오랜만에 만난 것이었는데 반갑다는 이유만으로 이모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올해 들어 엄마와 아빠도 번갈아가며 병원에 한 번씩 입원했다. 다행히 큰 병들은 아니었지만 며칠간 입원하고 여러 검사를 받는 일들은 모두에게 힘든 일이었다.
이번 휴가는 해야할 일이 많은 휴가가 될 것이다. 다 제쳐놓고 쉰다기보단 지금만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테다. 벌써부터 다시 돌아와 일할 것이 걱정되지만 놓고 보면 걱정할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