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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Mar 10. 2024

운전이라도 해서 다행이야

가까이 오면 무서워요

입사 10년 만에 다시 막내가 됐다.

사실 전보 전, 지금의 부서에서 제안이 왔을 때 감사(監査)라는 일의 무게가 가볍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 '가보겠습니다'하고 답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 자리가 부서의 막내 자리였기 때문이다. 기존에 근무하던 곳에서는 나에게 중재자, 허리역할을 기대했기에 일하는 동안 그것은 적잖은 부담이 되곤 했다.



내 차 뒤에는 운전을 시작하며 붙여 둔 초보운전 스티커가 아직 붙어있다. 귀여운 판다 그림과 함께 쓰인 '가까이 오면 무서워요.'라는 문구. 여러 초보운전 스티커 중에서도 그 문장을 택하게 된 건, 그 의미가 아마 내 인간관계에서도 비슷하게 작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에 비해 일찍 입사해 직급은 높아도 나이는 어렸던 나는, 소문자 mz가 되어 대문자 MZ후배들과, XY선배들 그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를 잘 유지하며 중심을 잡아야만 했다. 어느 한쪽과도 찰싹 달라붙어 가는 것은 위험했다. 적당한 간격과 여백을 두었다. 어느 한쪽이든 무조건적인 공감을 바라고 다가올 때면 혹여 물들어버릴까 무서웠다. 그들이 무서웠다는 것이 아니라, 잘 대응하지 못할 나 자신이. 사람마다 제각각인 안전거리를 파악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안전했다. 내가 그 거리를 유지하며 다가가면 되었으니까.




10년 만에 막내가 되어, 오롯이 선배님들하고만 함께 일하게 되었다. 나름 10년 간의 사회생활로 다져진 경험과 눈치로 적당히, 알아서, 잘 해낼 거라 생각했거늘 곳곳에서 실수가 있었고 미숙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막내'라는 이유만으로 그 모든 것이 용인되었고 수용을 해야 했던 사람에서 당하는 사람이 되니 그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직 처음이잖아.", "어리잖아." 30대 중반에 듣는 이런 말들을 듣다니 소중하다 못해 낯간지럽다.



새 부서에 온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2박 3일간 어느 선배와 함께 출장을 가야 했다. 아직도 크게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낯간지러운 '처음이고 어린 나'는, 우리가 가야 할 출장지가 차가 없이는 다니기가 좀 불편한 곳이라는 선배의 말에 낯설고 다소 먼 곳이지만 내 차로 선배를 모시기로 결심했다. 이번 출장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선배가 하는 업무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공부하는 일이었기에, 그 말은 곧 선배가 업무를 하는데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게 눈치껏 조용히 서포트를 잘하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했던 그곳은 출장지에 도착한 이튿날에 대설주의보가 내려 3월에 펑펑 내리는 눈을 맞아야 했고, 다행히 영상의 날씨에 눈은 금방 녹았다. 그 사이에 차의 외관은 엉망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차가 없었다면 정말 선배와 돌아다니기가 힘들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장지에서의 업무가 마무리될 무렵, 차에서 선배가 물었다. "어때? 뭐 좀 배운 것 같아?"


"아뇨."

핸들을 잡은 채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나 이번 출장에서 내 역할은 크게 없었고, 10년이 넘은 경력이 무색할 만큼 부끄럽게 그의 보조로만 머물렀으니까. 그리곤 덧붙였다. "저 이번 출장에서 운전이라도 안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운전이라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것마저 못했다면, 선배가 나를 파트너로 데리고 출장 나온 것을 후회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업무가 끝나고 선배를 기차역에 내려드린 뒤, 나보다 더 역할에 충실했던 내 차를 이렇게 지저분한 모습으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인근의 자동세차장을 찾아가 곧바로 세차를 했다. 차의 더러워진 눈자국이 씻겨 나가고, 나의 부담도 씻겨 내려갔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다음 행선지는 집도 아닌, 출장과 전혀 관계없는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또 다른 도시. 그곳은 신입 시절 함께 근무했던 어느 선배의 현 근무지와 크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며칠 전 선배에게 그곳에서 조심스레 만남을 제안했는데 그녀는 흔쾌히 내 제안에 응했고, 우리는 각자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둘이서 얼마나 떠들었는지. 그날의 영업종료가 임박했다는 종업원의 경고멘트에 부랴부랴 일어섰을 땐, 이미 둘이서 네 시간을 넘게 떠든 이후였다.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사람과, 사소하기 그지없는 대화들로 시간을 꽉 채웠다. 그렇게 짧고 즐거운 만남이 끝난 뒤 우리는 이렇게 종종, 그리고 불현듯 만나자며 또 다른 갑작스러운 조우를 기약한 뒤 헤어졌다.




몇 달 만에 갑작스레 전국을 쏘다니고 있는 내 상황이 웃기기도 하면서, 그 사이 애틋해진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건넨다. 그나저나, 운전을 할 줄 알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작고 소중한 붕붕이 덕분에 조금이나마 내 역할을 하며 산다. 그리고 고맙고 아끼는 이들에 내 다가갈 수 있게끔 도와주니 얼마나 고마운 녀석인지.


그녀는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그 도시에서 하루를 더 묵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곳의 숙소에 있는 동안 이 글을 썼다. 매일 아침 부랴부랴 숙소를 나서야 했던 출장지와 달리, 하루지만 내가 좋아하는 TV도 실컷 보고 체크아웃 시간까지 시간을 알뜰히 썼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나 차간 간격이 서로의 안전을 보장하듯, 또 당분간은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스스로를 돌볼 것이다. 나는 이제 비밀이 많은 업무를 하니까. 그래서 여전히 가까이 오면 무섭다. 이젠 상대가 나를 들이받을 것 같아 두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두려움을 오롯이 홀로 사유하는 시간으로 활용해야겠다.



그러니 다시 혼자여도 괜찮다.

내가 적당히 다가가면 되니까. 나의 작고 소중한 붕붕이와 함께. 이젠 적당한 거리유지와 적당히 다가갈 줄 아는 그 사이에서, 나는 새로이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어쩌면 또 다른 중재 역할의 시작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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