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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n 02. 2024

가방을 놔두고 간 이들

의도된 빌미

언젠가부터 일상이 의도하지 않는 대로 흘러가는 느낌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역마살이 과도하게 끼어있는 시점은 없을 듯. 심지어 이 역마살이 향하는 방향도 내 의도와 관계없다. 원하던 곳을 마음먹고 여행했던 때와 달리,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출장을 가라 하면 가야 한다. 출근한 주간도 가만히 자리를 지킬 수 있는 날이 별로 없다. 출근일 자체가 짧으니, 내가 없는 사이에 나는 이미 어느 모임의 파티원으로 등록돼 있고, 아무 소식도 모르다 당일 갑자기 회식에 차출돼 끌려가기도 한다. 행적의 주도권을 빼앗긴 느낌.


그러다 보니, 개인적으로 챙겨야 하는 일들이 뒤로 미뤄지기도 한다. 이번 주엔 만기 된 적금도 제때 해지하지 못했다. 내 것도 챙기기 버거운데, 주변인들까지 챙겨야 하니 가끔은 그들이 서운해하지는 않을까 걱정이 다. 남들을 챙기는 데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품고 있는 비밀도 많은 데다 무엇보다 내가 아끼는 이들을 일일이 챙길 마음의 여유도 없다.




햇살 따스한 6월의 첫날, 나의 가장 오랜 친구 사랑하는 동생이 결혼을 했다. 오래전부터 준비된 일정이었지만, 올 초 발령이 나버린 탓에 막바지 결혼준비에 언니로서 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있었다. 멀리서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금전적인 도움뿐인데,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것 같아 지난 주말엔 작정하고 동생과 동생의 전 남친이자, 남편 된 두 사람에게 손 편지를 썼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로운 선물 중 하나가 진심을 담은 편지란 걸 알기에. 메모장에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뒤 글씨로 받아 적고 인천에 올라가는 아침, 동생에게 나중에 읽어보라며 편지 두 통을 전했다. 이것으로 그간의 미안함을 대신할 순 없겠지만,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의 진심은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다음 주엔 아끼는 후배의 생일이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 먼저 근무해 본 경험이 있던 친구였는데, 발령이 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 앞으로 화분과 함께 후배의 편지가 도착했었다. 낯선 곳에서 헤매진 않을까 청사의 지도까지 손수 그렸던 편지엔 응원과 격려의 말이 쓰여 있었고, 택배를 받은 날 고마운 마음에 파티션 밑에 숨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역시 필체로 전해지는 정성의 힘은 위대하다. 한때, 후배의 근무지로 공식적인 문서인 양 위장하여 응원의 편지를 보낸 적 있었는데, 강한 척하지만 여렸던 그녀의 마음에 위로가 되고자 행했던 일을 나는 더 크게 보답받았다. 그리고 다음 주 그녀의 생일을 앞두고 있으니, 그녀에게 줄 손 편지를 쓰려한다. 무슨 선물을 사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은지는 명확하니 다행이다.




의도와 관계없이 잡혔던 어느 회식일.

선배들을 내 차에 잔뜩 태워 식당으로 향했는데, 덩치 큰 아저씨들이 작은 내 차 안에서 어찌나 시끄럽게 떠드는지 잔소리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지금 제 차가 많이 놀 것 같거든요. 조금만 조용해 주시겠어요?"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장난기 가득한 잔소리에 우리 아버님(나는 그들을 통틀어 언급할 때, 아버님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들은 모두 아버지니까.)들은 그저 허허실실 웃을 뿐. 식당 근처 공영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어이없게도 아버님들 모두 가방을 고 내리지 않았다. 분명 2차까지 가 텐데, 는 2차까지 갈 생각이 없니다만.


"저기, 아버님들. 왜 가방 안 갖고 내리시죠?" , 2차 장소까지 태워주든지 다음 날 출근에 가방을 그대로 들고 오든지 알아서 하란다. 세상에. 자유로운 퇴근 시간 이후 회식도 마음대로 잡아놓고, 가방도 안 갖고 내리는 이런 불량승객들을 봤나.


하지만 안다. 그들도, 나도 의도와 관계없이 이곳에 와 있고 의도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일정 속에 함께하는 이 시간들이 찰나라는 것을. 영원히 같이 근무하는 동료는 없으니, 당연한 듯 보이는 이런 날들도 언제까지 계속되진 않음을. 결국 그날, 나는 그들을 2차 장소까지 모셔다 드리고 퇴근을 했다. 2차는 안 가도 되었으니 다행이고, 강제로 연행된 저녁 식사였지만 역시나 내 지갑은 열 일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 차에 지금 몇 명이나 가방을 놔두고 내린 건지 모르겠다. 영원을 보장받지 않는 관계 속에서 하나씩 다시 연결될 빌미를 서로의 마음에 놔두고 내린다. 그렇게 나도 휩쓸려가는 일상 속에서 손 편지를 쓰고 상대를 생각하며, 그들이 놔두고 내린 가방을 확인한다. 의도와 관계없이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그렇게 모두 하나씩의 빌미를 남겨둔 채 의도적으로 서로 연결된다.


그러니 불량승객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나 또한 언젠가 그들의 차에 가방을 놔두고 내렸을지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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