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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n 09. 2024

우선순위로부터의 우회

우회로의 끝에서 만난 정상석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 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나는 우선순위를 정할 때 현명함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다양한 선택지를 부러워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의 명확한 할 일을 부러워한다. '어른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잖아요.'와 '학생은 공부만 하면 되잖아.'의 차이랄까. 점점 더 할 일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 난이도가 높아지고 있다. 그 일에 자신감을 얻는 것이야말로 진짜 어른이 아닐까 싶은데, 요즘 들어 우선순위를 매기기보다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해야 할 일에 있어서의 우선순위, 인간관계에 있어 사람의 도리로서의 우선순위, 그 와중에 조용히 잊히고 있을지 모를 숨은 할 일을 후보로 끌어올리는 일. 크기도 무게도 제각각인 과제들이 테트리스 게임처럼 내려오는데 단시간에 나는 그것 맞는 자리를 찾아내 모양을 바꿔 넣어야 한다. 타이밍을 놓치면 할 일은 이상한 모양으로 쌓여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이렇게 바쁜 가운데에, 이번 주는 친한 후배들과 분기별로 한 번씩 있는 등산 모임이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선배로서 후배들이 떠먹여 주는 걸 받아먹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계획에 동참할 여유도, 의견을 보탤 시간도 없었으니. 나는 그저 그들이 하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따랐다. 그렇게 몸만 오라는 그들의 말이 고마워서라도 바쁜 가운데 다른 우선순위들을 밀쳐내고 떠나야 했다.



오래간만에 떠난 산행. 한동안 운동을 하지 않은 몸으로, 짧은 스트레칭 후 산을 오르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오르다, 잠시 쉴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과, 숲이 내뿜는 초록의 기운이 또다시 길을 나설 수 있게 도와줬다. 가뜩이나 복잡한 일상 속에 이렇게 등산까지 가는 것이 과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등산을 오르면서 힘들지만 그것 하나는 좋았다. 그 어떤 우선순위를 매길 필요 없이 앞만 보고 가기만 하면 된다는 것. 어떤 것이 더 나은지 골라야 하는 선택지가 없다는 것. 그래서 어쩌면 조금 더 여유 있었을 때 다녔던 산행보다, 이번 산행이 힘들어도 마음은 단순해서 좋았다.


나는 흐릿하고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마음 편히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늘 산에 가고 싶다. 산에서는 모든 게 확실하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는 그 리듬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어쩌면 나는 다른 무엇이 아닌 그저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고 싶었는지 모른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출발하면 일출의 장엄한 광경을 볼 수 있다. 지금 출발하면 저 산을 넘을 수 있다. 내가 발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여정을 마칠 수 있다.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이 모든 걸 보상받을 수 있다.

최소한 산에서는 사는 게 단순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다.

- 산뉘하이Kit, '산이 좋아졌어' 중 -


나는 책의 저자만큼 등산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저 글만큼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저 앞을 향해 오르기만 하면 되는 것. 과정에 충실하면 결과는 명확하니까. 과정에 충실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그 과정에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이 나를 늘 힘들게 했다. 결과는 때론 열심과 관계가 없으니까.



산에서 내려온 뒤, 후배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밤새 한참을 떠들었다. 함께 있는 시간 내내 서로에게 편함이 느껴지지 않게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오래 함께한 시간이 만들어 준 배려와 눈치. 손발이 척척 맞는 것,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때론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해하는 것. 우리끼리는 '괜찮아'보다 '고마워', '미안해'라는 말을 더 자주 하기로 했다.




산행 후 피곤했을 테니 늦잠을 자보겠다고 모두의 알람을 늦은 시간으로 맞췄지만, 오랜 직장생활로 인해 알람보다 모두 일찍 일어나 버렸다. 다른 건 몰라도 어쩌면 이렇게 열심이었던 과정 남긴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아침에 절로 일찍 떠지는 눈과, 상대가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마저도 고마운 때와 미안한 때를 알아차리는 것. 우선순위를 따지지 않고 함께한 시간이 남긴, 앞만 보고 올라 닿았던 꼭대기의 정상석처럼 남겨진 무언가가.



기차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온 지 이틀 만에 나는 다시 또 기차를 타고 다음 출장지에 도착했다. 우회의 시간을 뒤로한 채, 새로이 시작된 주와 함께 다시금 우선순위의 전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순위결정의 결과가 최선이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후회 없는 선택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시간들이 산을 오르는 일과 같아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그 시간의 끝에 무언가 하나라도 남아있기를.


그러니 아직 몸에 남아있는 근육통이 나아지기 전에 글로 남겨둔다. 짧은 우회의 시간이 알려준 무언가가, 우선순위에 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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