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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n 16. 2024

다시 만나 웃을 수 있을까

떠돌이 가족

감사부서의 막내가 되었을 때에 나는 그저 자잘한 서무를 하며, 선배들을 지원하는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나에겐 감사관으로서의 역할이 크게 주어지리라 생각하지 않았거늘. 게다가 그동안 직장 내에서 주로 고민 상담이나 위로, 격려의 역할을 하는 동료로서 지냈기에,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나의 주된 역량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직원들의 신고 정신은 투철해졌고 누구보다 자기 문제가 가장 크게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바쁘다, 힘들다 말할 수 없었다. 나 또한 그 와중에 뒷짐 지고 저는 역량이 부족하니 지원만 하겠습니다, 하고만 있을 순 없는 형국이었다.


부서에 온 이후로 처음 주도적으로 진행했던 면담이 2주 연이어 있었다. 한 사람은 울었고, 한 사람은 퉁명스러웠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려 온 것뿐인데, 누군가는 사실 뒤에 숨겨두었던 본인의 마음을 드러내며 눈물을 보였고, 누군가는 숨겨둔 사실이 드러날까 나이와 지위를 이용 불쾌함으로 잔뜩 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 이게 맞는 걸까.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노트북이 들어있는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이 어깨를 짓누를 때마다 거북이라면 등껍질 밑으로 숨을 수라도 있을 텐데, 도망은커녕 다시금 내일 이 가방을 메고 누군가의 앞에 앉아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이곳에 와 처음으로 전화로 누군가에게 감사 사실을 통보해야 했던 날, 며칠 전부터 긴장상태에 당일 점심엔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긴장 속 전화를 끝낸 뒤, 그날 저녁회식을 생각해 혼자 몰래 소화제를 먹으며 업무를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가까스로 끝낸 이번 면담에도 선배들은 내가 긴장한 탓에 말이 빨라졌다고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상했던 결과를 이끌어 낸 것에 장하다고 칭찬을 건넸다.



오래 전, 감사장 문을 열고 들어가 나에게 전화를 건 감사담당자의 앞에 앉아있, 감사를 받던 때가 생각난다.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다소곳이 앉아 그의 요구사항을 듣고 있던.


의도하지 않게 이제 나는 노트북 화면을 볼 수 있는 안쪽 자리에 앉게 되었고, 전화를 걸어 내 앞에 다른 이를 앉히게 되었다. 예전엔 몰랐었던 이 자리의 마음을 알게 된다. 부디 그대가 가져다 줄 자료에 큰 거슬림이 없기를. 그리고 혹여 그곳에 초점을 맞출 때에 그대가 사실만을 말해주기를. 오래 전,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 다소곳이 앉아있던 내 앞의 그들도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눈에 들어 온 거슬림이 무난하길 바라는, 그때의 그들도 이런 바람이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언젠가 이곳을 떠나 다시금 내 앞에 앉아있던 이들과 함께 일하는 때로 돌아가야 한다. 과연 다시 만나 그들과 웃으며 근무할 수 있을까.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를 생각하며 일하기, 주어진 일은 벅차고 오래 남을 보고서를 가장 떳떳한 형태로 남기기 위해 그런 걱정은 잠시 묻어둬야 한다.




캐리어를 끌고 거북이 가방을 메고 왔던 이번 주의 출장지. 다소 시골스러웠던 풍경, 그리고 살며 한 번도 와볼 거라 생각해 본 적 없던 곳. 선배의 차 옆자리에 앉아 창밖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떠돌이 같아요, 우리."



감사실의 막내로 온 이후에, 용기를 내 선배들에게 요청드린 일이 있다.

가능하면 많은 이들이 함께 출장 나갔을 때에, 저녁 식사 후에 인생네컷 사진관에 가서 다 같이 사진을 찍자고. 처음엔 다들 부끄럽다고 꺼려 하셨지만, 막상 사진관에 가서는 아이들처럼 선글라스와 머리띠를 자연스레 쓰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렇게 남긴 사진들을 내 사무실 파티션에 붙여 둔다. 딱딱하게 남는 보고서와 별개로, 모두의 기억에 자리할 '나의 감사일지'의 일환으로.


이번 출장지에서도 우르르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감사장에서 굳어있던 표정들은 어디로 가고 다 같이 짓궂은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며 새로이 한 순간을 남겼다. 점점 선배들도 즐기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다. 나이가 들수록 사진 찍는 일이 싫었는데, 이 사진은 다르다. 좀 못생기게 나와도 괜찮다. 떠돌이 가족의 행복한 한 장면.



한 달 사이 잠을 잤던 곳이 4~5곳이 되는 것 같다. 다행히 잠자리를 가리던 습관은 사라졌고, 나는 이제 어디서든 잠을 잘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든 잠을 잘 자게 된 것과 달리, 어디에도 내 마음 온전히 두지 못한다. 매일 바뀌는 풍경과 내 앞의 사람들. 마주하고 있는 것 중 변하지 않는 것은 거울 앞의 내 모습뿐.


다시 만나 웃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에 앞서, 매일 다시 만난 거울 속의 나에게 일단 웃어 보이기로 한다. 새로운 풍경, 낯선 장소,  방황하고 있는 떠돌이에게 변하지 않는 모은 이것이 유일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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