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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n 23. 2024

Time Changer

새로운 백야행

백야를 처음 경험했던 건, 2016년 핀란드를 여행하면서였다. 더위를 싫어하는 대프리카 출신의 여행객에게 북유럽만큼 여름 여행지로 적합한 곳은 없었다. 그리고 그때에 밤 9시가 넘어 노을이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을 처음 보았다. 밤이라는 시간과 달리 밝은 거리는 여행객에게 더욱 안전하게 느껴졌고, 끊어져가는 다리의 고통을 잊은 채 늦은 시간까지 여행을 이어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땐 지금보다 훨씬 젊었으니, 백야가 나의 여행시간을 늘려주는 것만 같아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가뜩이나 빨리 흘러가 한정적인 여행 추가시간을 부여받은 듯한 느낌.



그리고 그다음 해에 덴마크와 스웨덴으로 떠났다. 다시금 여름의 백야를 경험하고 싶었다. 낮이 긴 것도 좋은데 선선한 날씨까지 그리웠다. 그렇게 도착한 북유럽은 역시나 그때처럼 잠을 잘 땐 커튼을 쳐야지만 잘 수 있었다. 밤은 짧았고, 아침은 어느새 빨리 돌아왔기에. 그리고 그 이듬해 발트 여행할 때에도 백야는 계속되었다. 해는 지지 않았고, 그만큼 여행자로서의 추가시간을 매년 부여받았다.

그렇게 나는 한때, 한창 백야를 쫓아 여행했다.



그다지 덥지 않은 날씨, 세게 비추는 게 아닌 오래 비추는 태양빛. 어쩌면 나는 그 장소가 아니라, 그 시간을 사랑했던 걸지도.


우리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바꾸기 위해 여행한다.

- 장피에르 나디르, 도미니크 외드 <여행정신> 중 -


내가 좋아하는 문장.

언젠가 제주를 여행했던 때, 1인용 숙소에 묵으며 방명록을 쓸 수 있는 계기가 있었고 그때에 이 문장을 방명록에 남겨뒀었다.



감사실에 온 뒤, 지금도 출장으로 전국을 여행하며 다른 의미의 백야를 경험한다. 여정은 저녁이 되어도 끝나지 않고, 출장지에서 돌아와도 머릿속에 남아있는 일의 잔상들이 꺼지지 않은 채 그 빛을 발한다. 백야를 쫓아 여행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백야에 쫓겨 여행한다. 물론 이 백야는 결코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장소가 아닌 시간을 바꾸기 위해 여행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때보다 지금이 더 알맞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공들이고 있는 시간이 약하게나마, 누군가가 맞이할 어느 훗날의 시간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지도 모르니.


무더운 날씨와 함께 해가 길어졌고, 길어진 만큼 강해진 햇살로 인해 기숙사에 있던 화분들이 출장 다녀온 사이 시들시들해져 버렸다. 그간 돌아다니느라 바빴던 부덕한 주인 탓에, 풍성했던 화분의 이파리들이 말라 우수수 떨어졌다. 물을 주고 며칠간 관심을 들인 덕분에 조금 살아나긴 했지만, 이내 떨어져 버린 이파리들은 다시 살려낼 수 없었다. 결국 나의 백야는 이 연약한 식물의 시간까지 바꿔버렸구나.




백야의 시간이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그 시간이 숨겨놓은 친절을 발견할 수 있었으면. 오랜만의 출근과 운이 좋게도 회식이 별로 없었던 이번 주. 일은 많았지만, 늦게 야근까지 하고 퇴근했음에도 기숙사로 돌아와 여느 직장인과 비슷하게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보내면서 입으로 "아, 행복하다."라는 말을 절로 내뱉었다. 사소하기 그지없는 빨래를 하며, 청소를 하며, 다시금 생각했다. 행복에 겹다 말하는 이 시간들이 어느 순간 말라 떨어져 버린 이파리들이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주의 새로운 출장지는, 내가 아끼는 문장을 남기고 온 제주. 다행히 사전좌석 지정을 일찍 할 수 있었고, 고민 끝에 창가로 지정했다. 밖을 보고 싶었다. 기차에서는 빨리 오르내리기 위해 늘 통로에 앉았으니까. 그러나 이번엔 나를 둘러싼 장소가 바뀌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떠나오기 전부터 장마라는 회색빛 암울함이 예보되었지만, 그래도 괜찮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장소와 날씨는 그 모양을 바꾸었으니, 이제 시간만 바꾸면 될 일이다.


나는 또 어떤 시간을 바꾸기 위해 이곳에 온 걸까. 그리고 지금은 어떤 시간을 바꾸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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