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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n 30. 2024

방파제 부수기

하나쯤은 괜찮잖아

휴대폰이 없던 초등학생 시절, 갑자기 비가 오면 학교 1층에 있는 공중전화 앞엔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엄마, 나 우산 안 갖고 왔어." 저마다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첫마디는 똑같았다. 그렇게 전화를 걸고 나면 엄마는 늘 교문 앞에 와 있었고, 어떤 날은 동전이 없어 전화를 걸지 못했던 때에도 텔레파시가 통한 것 마냥 엄마는 교문 앞에 서서 나를 단번에 찾곤 했다. 그렇게 기대하지 않아도, 대비하지 않아도 우산을 가져다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생각해 보니, 그런 날은 갑작스러운 비가 나쁘지 않았다. 엄마랑 나란히 우산을 쓰고 집에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으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듯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씌워줄 이가 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행여 짐이 되더라도 비가 예보되는 날엔 항상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야 하고, 언제 어디서든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초연해져야 하는 것. 교문 밖엔 엄마가 서 있을지언정, 회사 문 밖엔 아무도 나와있지 않다. 모든 여정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 어른이라면 아무도 책임을 갖지 않는 대책 없는 소나기에 마중 나오지 않는 누구를 탓하기보다 미리 우산을 들고 길을 나서야 하고, 우산을 들고 나서지 않았더라도 알아서 집까지 돌아가야 한다. 나는 그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인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본 영화, '인사이드아웃 2'.

아무 생각 없이 보러 간 영화의 말미에 대책 없이 눈물이 났다. 성장한다는 것은 감정의 범주가 넓어진다는 것과 더불어, 불안한 하루 속에 어찌 될 줄 모르내 안의 방파제를 계속해서 쌓아두는 것. 걱정가득한 날들 속에 예측은 대체로 낙관적이지 않았고 생각해 둔 경우의 수를 대비해 티 나지 않게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여기서 포인트는 '티 나지 않게'. 내 안의 자라지 못한 아이를 숨겨두고 자연스러워야 했다. 그래서 가끔은 성격에 맞지 않는 연기를 할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제삼자가 지켜보는 내 모습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울지 부끄럽기까지 했다. 내 인생이 혹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작가가 이 또한 계획한 걸까.



제주에 장마가 올 거라는 예측과 함께 출장을 떠났거늘, 생각보다 날씨는 주의 중반까지 괜찮았다. 혹시나 싶어 육지의 날씨와 상관없이 챙겨간 바람막이는 매일 아주 요긴하게 입었다. 어쩌면 이 또한 스스로 미리 챙겨두어야 하는 우산 중에 하나였으려나. 무언가 가득 싸 올까 싶어 여유공간을 남긴 채 들고 갔던 캐리어는 그대로 들고 돌아왔다. 제주에 있는 동안 가장 맛있게 먹었던 하우스 감귤은 택배로 집에 보내버렸고, 출장이 목적이었던 이유 때문인지 아기자기한 소품들도 크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비가 올까 걱정인 것, 렌터카에 선배들을 모시고 돌아다녀야 하는데 혹시나 길을 헤매진 않을까. 알아봐 둔 식당이 괜찮을까. 그런 걱정들을 티 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숨기며 5박 6일을 채웠다.


어쩌면 그렇게 부자연스러움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 순간들을 캐리어의 빈 공간에 넣어두고 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이번 출장에 앞서 미리 쌓아둔 방파제였을지도.




이제와 한참이나 지나버린 이야기에 이 정도의 이야기 하나 남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남겨보건대, 나의 첫사랑은 제주 출신의 순수한 남자아이였다. 그래서인지 20대엔 제주에 갈 때마다 뜬금없이 그 아이 생각이 났다. 풋풋했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제주를 여행할 때에 한 번씩 떠올리곤 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제주에 있을 때면 다시금 어려지는 느낌이 든다. 특히나 육지와는 조금 다른 제주도의 풍경, 그 장면들은 나를 늘 겸손하게 만다. 다시금 순진하고 미숙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돼버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그리운 것은 아니다. 그 아이보다 그 시절을 아꼈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됐으니.)



영화를 다 보고 나와 화장실에 가 손을 씻는데도 울컥 아랫입술이 떨리곤 했다. 미숙하기 그지없던 시절들이 지금을 만들었고, 결코 좋은 것들과 무난했던 것들만이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이 아니란 것을. 짐작만 했던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나를 들여다본 것만 같았다.




영화의 여운이 남은 상태로 내 안의 불안이가 만들어 놓은 걱정들을 꽁꽁 싸맨 채, 제주를 다녀왔다. 육지로 다시 돌아와 풀어낸 여장 안에 불안들은 그대로 남아있었을까. 100원짜리 동전만 있어도 우산을 가져다줄 이에게 전화를 건넬 수 있던 때와 달리, 지금은 누구에게나 전화를 걸 수 있는 핸드폰이 옆에 있어도 갑작스러운 일상의 소나기는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내 몫이다. 그렇게 소나기를 감당하는 방법을 터득하며, 방파제를 쌓아두며 어른이 된다.


그러나 돌이켜보니, 여전히 미숙했고 미약했다 생각했던 여정들이 결과적으로 미완성은 아니었음을. 그러니 이 글을 위안 삼아 하나의 방파제 정도는 부순 채 다음 주를 맞이해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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