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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Jul 07. 2024

우산 아래 숨죽여

마음의 장마

항상 기숙사 내 방에 들어면 바로 노트북을 펼쳤다. 아무도 없는 적막함이 싫어서. 자연스레 음악을 틀고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공간을 다른 이의 목소리로 채웠다.


그러다 장마철, 비가 세차게 내리는 순간엔 음악을 껐다. 그런 날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음악소리보다 훨씬 듣기가 좋았다. 사람의 목소리보다 더 위로가 되는 느낌. 간섭하지 않고 조용히 내려오려 했다, 그 무게에 더 힘을 실어버린 비는 요란스러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늘 장마철에 조금씩 앓았다. 지난해 장마철에 쓴 글을 읽었다. 꿉꿉함이 온몸을 침투할 때에 나는 이 꿉꿉함이 가시기 전까지 늘어지게 게을러지고 싶다고 써두었었다. 습한 날씨에 빨래를 미루듯 생각정리도 미루겠다고. 역시 장마의 습기가 올 때쯤이라 그런가.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쓸데없이 한 번에 의미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끈적한 언어들과, 온전히 흡수되지 않는 관계들 사이에서 살짝 몸살을 앓고 있다. 내가 필요한 이들보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군중 속의 외로움과,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 다가올 때마다 기운이 빠져 자꾸만 용기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알지 못했으나 마음속에도 장마가 찾아왔다. 어쩌면 올 때가 되었다.



이래서 그런 걸 거야, 저래서 그런 걸 거야. 온갖 이유를 떠올리며 나를 이해해보려 했다. 이유에 이름표를 붙여줘야지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타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멋대로 해석하고 멋대로 우울해지는 감정 속에서 가장 위로가 됐던 것 빗소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 습기를 만들어내는 비의 소리. 그 새찬 빗줄기의 강한 자기주장이 부러웠다.


창밖을 바라보며 짧게, 요란스럽게, 본인을 드러내고 이내 모든 걸 깨끗하게 만들어버리는 잠깐의 폭우를 지켜보는 일이 좋았다. 잘 숨기지도 못할고, 그렇다고 강하게 드러내지도 못하는 줏대 없는 나 자신 보다 그 확실한 편향됨이 외려 부러웠다.




세차를 안 한 지 오래되었다. 가끔씩 비가 이렇게 내려주니까. 겨울과 봄엔 눈비가 내린 뒤엔 차가 엉망이었는데, 여름은 다르다. 비가 세게 내린 뒤, 맑게 개인 다음 날 길을 나설 때 깨끗해진 차를 보는 일이 소소하게 즐겁다. 그렇게 내 안에서도 이 기간이 지나면, 무언가 쓸고 내려갔기를.


나는 이제 이유를 밖에서 찾지 않으려 한다. 하루 동안 이유를 밖에서 찾다 방으로 돌아와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알게 되었거든. 대부분의 이유는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는 걸. 탓할 거리를 찾는데 쓸데없는 시간을 보냈다는 걸. 하룻밤이 지나면 나아지는 일이 꽤나 많았다. 그래서 어떤 판단이든 말이든 하루 만에 내리고 내뱉지 말아야겠다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한밤 중의 비에 다음 날 차가 깨끗해져 있듯, 다음 날의 내 마음도 어찌 될 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최근 들어, 피곤해 보여- 힘들어 보여- 그런 이야기들을 가끔 듣는다. 그런 그들의 말 한마디가 마음에 장마가 들었다는 빗소리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또 '괜찮아요'라는 말로 그 말들을 맞받아쳤다. 마음에 우산을 씌웠다.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려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사람이 되었고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다
나는 나를 외로이 버려두었지
날 키운 건
모두에게서 사랑받으려 했던
미움이 두렵던 마음

- 강아솔,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中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마음이 아팠다. '괜찮아요'의 이면에 있던 어느 날의 내 이야기인 것도 같아서. 하지만 늘 그랬듯, 그 모든 것은 잠시 뿐일 것이다. 그러니 나는 우산 아래 숨어, 숨죽여 내 숨소리를 듣는다. 그 아래에 숨어 시야를 가리고, 아무도 보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나를 토닥인다. 그러다 가끔 해가 나면 우산을 걷 하늘을 보며 숨을 고르지 뭐.


그저 장마가 온 것이다. 그 마음을 깨닫는데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우산을 들고 있는 팔이 조금 아프지만 괜찮다. 알 수 없던 감정의 원인을 찾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그저 장마가 온 것이다. 역시 작년 장마에 글을 써두길 잘했다. 지난해의 장마도 잘 넘겼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기록이 또 다른 기록에 덧대여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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