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으로 발령받아 온지도 반년이 훌쩍 넘었다. 겨울에 왔으나, 봄과 여름을 지나 이제 가을로 접어들려 한다. 아직도 모르는 것, 모르는 곳 투성이인 데다 1년의 주기를 돌지 않았으니 여전히 처음 해보는 일이 대부분이다. 동료들에게 티 내지 않으려 애쓰지만, 나는 매일 자연스러운 척, 익숙한 척하는 연기를 한다.
새 업무를 맡으며 처음으로 주관하는 부담스러운 행사. 외부 손님들을 불러 회의를 진행하고 식사를 대접하면 되는 단순한 행사였지만, 웬일인걸 내가 맡은 이후로부터 일이 복잡하게 되어 타 기관 직원에다가 그 기관의 외부손님까지 모셔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장소도 내가 있는 인천이 아닌 서울. 나 홀로 PD가 되어 회의자료와 온갖 행사 준비물들을 챙겼는데, 문제는 이 많은 준비물들을 챙겨 가장 붐비는 출근 시간에 인천에서 서울 방향으로 가야 한다는 점.
차를 끌고 가기엔 쭈구리 지방러에게 서울의 복잡한 도로와 주차비는 막막하기 그지없었다. 하긴 차보다는 지하철이 빠르긴 할 텐데, 가만 보자- 이 짐들을 어떻게 들고 간담. 기숙사에 있는 카트에 짐을 넣어 끌고 갈까, 캐리어를 가지고 갈까. 어이없는 건, 막바지까지 준비를 거듭하느라 어떻게 회의장까지 가야 할까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선배들은 그 시간이면 카트든 캐리어든,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하철이 숨 쉴 틈 없이 붐빌 것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종점까지 가서 거기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막막한 고민에 시름시름 늙어가는데 어이없게도 행사 전날 저녁엔 회식까지 있었다. 퇴근하고 진행 시나리오를 연습해도 시원찮을 판에 회식이라니. 회식만 아니었으면 사실 서울에 가서 1박을 할까도 고민했거늘. 그러나 막내에겐 선택권이 없으니, 우선 회식장소에 가기 위해 퇴근하고 짐들을 차에 실었다. 주차장까지 들고 가는 동안 준비물의 상당한 무게에 놀랐다. 이거 다 들고 갈 수 있으려나.
그때 내 차에 올라타신 부장님이 내일 행사에 쓸 짐들을 보시더니 대뜸, 내일 아침 인천에서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가라고 하셨다. 부서운영비로 지원해 주겠다며. 택시비가 어마무시할 거라는 나의 말에, 부장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부서운영비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이따가 내가 회식 때 직원들 있는데서 얘기할게."
2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택시를 타보지 않은 소심한 이 몸은 아무리 그래도 말씀만 그렇지 성의만 받아야겠다 생각했다. 회식 중에도 틈틈이 어떡하면 합리적인 코스로 서울까지 갈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렸다. 회식 장소는 횟집이었는데, 술도 잘 못하고 이왕 온 회식이니 본식에 집중하자는 생각으로 열심히 먹기만 했다. 그러던 도중 부장님이 운을 뗐다. "내일 막내과장이 서울까지 출장 가는데 부서운영비로 택시비를 지원해주려고 합니다. 반대의견 있으신 분?" 당연히(?)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우선은 알겠다고 하고 그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말씀은 저렇게들 하셔도 지하철을 타야 하지 않을까. 한두 푼도 아니고.
그 무렵 잘 구워진 청어 3마리가 우리 테이블에 나왔다. 배도 슬슬 불러오고, 심심해진 찰나에 잘됐다 싶어 생선가시를 열심히 바르기 시작했다. 본의 아니게 어릴 때부터 아빠로부터 배워둔 생선가시 바르기 기술의 시전. 부장님 앞에 손질이 끝난 청어구이가 놓아졌을 때, 그는 내가 발라놓은(?) 결과물에 사뭇 놀란 듯했다. "세상에. 우리 엄마도 이렇게 안 해줬어!"
"이 정도면, 내일 모범택시 타!"
뒤이은 부장님의 화통한 말 한마디에, 모두들 웃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는 부장님이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내일 택시 안 타고 가면 큰일 나겠다며 꼭 택시를 타고 가라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와 지도앱으로 부단히 예상 경로와 저렴한 비용을 노렸지만 쉽지 않았고 회의 당일 아침엔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앱으로 콜택시를 불렀다. 예상 금액은 역시나 4만 원 이상.
다행히 친절한 기사님을 만났고,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지나 밀리고 풀리는 반복적인 구간을 넘어 근 1시간 30분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통행료 포함 택시비 48,500원. 생선가시 바르는 잡기 덕분에, 조금은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고 몸과 마음 편히 도착한 서울. 언제 내가 이 돈 주고 택시를 타보겠는가.
현란한 젓가락질 덕분에 상당한 에너지를 아꼈다. 부장님은 앞으로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으면 그 앞에서 생선 가시를 바르라는데, 과연 플러팅에까지 확대될 수 있을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