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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Aug 25. 2024

묻어뒀지만 가진 것

중고행운

미니멀리스트로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책은 이북리더기로만 읽게 됐다. 여러 번 읽고 싶어지면 그때 종이책을 사기로 했다. 특히나 출장이 잦아져버린 내 일의 특성상 최대한 짐을 줄 다녀야 했고, 그러다 보니 점점 오갈 때 짐을 줄이게 다. 옷은 빨래해서 입을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한의 개수로만 들고 다니고, 화장품은 아무거나 바르다간 또 피부가 뒤집어질 수 있으니 늘 쓰던 것들로 작은 공병에 담아 다닌다. 어떻게든 최소한으로, 가장 가볍게 떠났다 돌아오는 것이 목표.


언젠가부터 이북리더기도 무겁게 느껴졌다. 예전엔 출장을 갈 때도, 본가에 갈 때도 꼭 챙겨서 들고 다녔는데 최소한의 무게로 다니려고 하다 보니, 책을 읽는 일도 어느샌가 예전만큼의 의지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였는지 점점 더 말은 어수룩해지고 쓰는 단어에도 한계를 느끼곤 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듣고 보고 경험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은 점점 어설퍼지는 아이러니.




본가에 온 주말. 이북리더기를 챙겨 오지 않았지만, 책을 읽고 싶었다. 책장에 쌓여있는 이미 읽은 책들에 손을 뻗었다. 선물 받은 책들을 제외하고 비교적 최근에 구매한 책들은 모두 중고서점에서 산 책들이었다. 나는 생전 처음 나에게 읽히게 될 활자보다 누군가에게 읽히다 온 활자들이 더 친숙했다. 이 책을 처음 산 사람이 느꼈을 감흥은 어땠을까 상상하며 읽는 것도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심스레 넘기지 않아도 되고, 어떨 땐 밑줄을 그어도 될 것 같은 그 익숙한 느낌도 좋았다.


아주 오래전, 중고서점에서 사둔 이병률 작가의 여행 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를 오랜만에 책장에서 꺼내 펼쳤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화제가 전환되며 툭툭 끊기듯 연결되는 여행지와 그의 문장들을 오랜만에 읽으니 기분이 새로웠다. 나도 다시금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툭툭 끊기듯 연결되는 삶. 내가 본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 그러나 나의 표현으로 인해 내 것이 된 것. 여행은 나에게 늘 그런 의미였으니. 술술 넘겨가며 페이지를 넘기다 순간 멈칫했다. 내가 언젠가 따다 끼워놓은 네잎클로버가 책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언제, 어느 곳에서 따온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왜 이것들을 이 책에 넣어둔 것이었을까. 혹시나 물이 들까 싶어 넓은 여백이 있는 페이지에 곱게 끼워 둔 네잎클로버 두 개. 눈에 불을 켜고 네잎클로버를 찾았을 때의 기쁨과 비슷한 반가움이 책을 읽다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주변 사람들에 비해 네잎클로버를 잘 찾는 편이긴 했다. 지금 가지고 다니는 핸드폰의 케이스 안에도 출장을 다니던 도중에 어디선가 발견한 네잎클로버 하나를 잘 말려 끼워 다닌다. 책에서 네잎클로버를 발견한 이후, 오랜만에 핸드폰 케이스를 분리해 꼭 숨겨두었던 네잎클로버를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언젠가 내 머리 위로 떨어졌던 벚꽃 잎 두 장도 같이 잘 말려 보관돼 있었다. 무더운 여름의 끝에 발견한 분홍빛 봄이라니. 내 눈에 발견된, 나에게 내린, 여린 것들을 나는 그동안 무심히 그러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구나.


모두가 다 나의 것이 아니니 손아귀의 힘을 빼고

내가 누구의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의 것이 되어 이리도 어렵게 몸과 마음을 사용하면서 사는지 가끔은 그 주인이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급하게 날을 잡아 열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어딘가로 도착해 그곳에 뭔가를 묻어두고 다시 돌아옵니다.

묻어두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묻고 묻어 작은 동산을 이루면 나는 그것들을 묻었다 하지 않고 가졌다 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르게 뭔가를 묻어두는 일은 모두 결핍에서 옵니다. 묻어둔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숨겨두는 일이지요.

그래서 하루에 한 번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려고 합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식물의 키를 살펴보는 일, 창문밖 까치집을 올려다보며 킁킁대는 일, 그 모두가 나의 결핍을 어루만져주리라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 이병률,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중 -



어쩌면 나도 그렇게 그 책에 내 눈에 띄었던, 나를 찾아온 행운들을 곱게 묻어두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묻어, 그것들을 묻었다 하지 않고 가졌다 하고 싶었던 걸까.


이미 알고 있던 글과 사진들이지만 간격을 두고 보니 새로웠다. 이제 집에 왔을 때마다 읽을 있는 책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 나는 책을 아껴 읽기로 했다. 그래서 주말의 끝, 네잎클로버도 원래의 페이지넣어 책을 고이 덮은 뒤 다시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 다음에 다시 집에 왔을 때, 언젠가 펼쳐본 그날의 행운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어느 날의 행운이 다른 어느 날의 행운으로 전해질지도 모르니까.


중고행운(?)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발견한 순간에 기쁘면 그만인 것을. 혹자는 지극히 자기 위주의 낙관주의자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렴 어때. 내가 설득하고 싶은 건 당신이 아니라 나 자신이니.




이미 써먹은 행운이라 새로운 효력은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눈에 띄었던, 나를 찾아온 행운을 소중히 간직한 사람이었단 걸 다시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그래,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었지.'하고 되새길 사람.


어느 날 문득 내가 묻어둔 행운이 또다시 불현듯 발'견'되, 또 그 기운을 발'현'하길 바라며 조용히 모른척하고 애써 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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