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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w Sep 29. 2024

제한시간은 일몰까지

let myself go

충격적이다. 벌써 한 해의 3/4이 사라졌다니. 다음 주면 4/4분기를 맞는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 많던 시간은 누가 먹었을까. 내가 먹은 거라면 소화는 잘 해온 건지. 항상 이맘때가 되면, 허무함과 더불어 한 해를 완전하게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곤 했다. 이렇게 남은 한 해를 보낼 순 없어. 무엇이라도 하나 남겨야 해. 그러나 그러기엔 당장 지난달에 계획했던 일들 중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실천한 것이 없다. 한 달이 또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


이번 주에 다녀온 출장지는 출장지 근처와 출장지를 오가는 길목에 보고픈 이들이 살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동료들이 분포하다 보니, 어디를 가게 되면 그 근처에 만날 사람이 없는 지부터 떠올려 보게 된다. 애써서 가기엔 멀 테니, 이왕 간 거 누구라도 만나 잠시라도 시간을 보내려고.


그렇게 출장 중 당일의 업무를 마친 어느 저녁, 그리고 출장을 끝낸 뒤 인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아끼는 이들과 반갑게 조우했다. 흔쾌히 시간을 내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는데, 연달아 모두 밥을 얻어먹었다. 낮엔 열심히 일하고 밤엔 열심히 먹고 즐겁게 떠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만남을 끝으로 그 부근에서 하룻밤을 더 묵었다. 그렇게 다음 날, 체크아웃 시간을 꽉꽉 채워 다시 길을 나섰고 주말 오후 여유롭게 인천으로 돌아왔다. 두 시간 정도의 운전이었지만 기분 좋은 가을 날씨에,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돌아오니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기숙사로 들어가기 직전, 근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곤 오자마자 일주일 간의 짐을 풀고 빨래를 했다. 세탁기를 돌리고 손빨래를 하고, 캐리어를 정리하는 데 한참이 걸렸다. 세탁기의 종료시간에 맞춰 빨래를 널고 나면, 곧바로 근처 성당의 미사시간이었다. 부랴부랴 빨래를 널고 미사를 갔다. 그 와중에 세탁기를 돌리면서 얼마 전부터 오랜만에 다시 하고 싶었던 속눈썹 펌이 생각이 났다. 마침 근처에 샵이 있었고, 미사 시간이 끝나는 것에 맞춰 예약을 하면 시간이 얼추 맞을 것 같았다. 미사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예약해 둔 샵으로 향했다. 그렇게 기분 전환으로 속눈썹 펌까지 하고 밖으로 나오니 그새 해는 다 져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드라마 한 편을 딱 보고 난 뒤, 바로 침대 위에 누웠다. 휴, 오늘처럼 부지런히 산 주말은 오랜만이야. 아주 흡족한 하루.




얼마 전, 백야에 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해가 지지 않는 북유럽의 여름 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이제 전국을 출장을 다니며, 해가 지지 않는 것처럼 밤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일을 하는 것 같다고. 백야를 쫓아다녔을 때와 달리, 지금은 백야가 날 쫓아온다. 밤이 돼도 사라지지 않는 일에 대한 걱정, 불안한 미래란 걸 알면서 멈출 수 없는 수백 가지의 가상 시나리오. 시나리오대로 된 건 거의 없단 걸 알면서도.



열심인 주말 하루를 보내고 어둑해진 밤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걱정과 무언가 해내야겠다는 아무도 부여하지 않는 혼자만의 부담은 잠시 잊고, 오늘처럼 해가 떠 있을 때만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자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면서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진다. 일과를 끝마치고 문을 나섰을 때, 이미 밖은 어두워져 있을 테니, 그러면 거기서 내려놓자고.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남은 올해의 시간 동안 야근으로 보낼 저녁과 더불어,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압박에 스스로를 밀어붙일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것을 끝내고 쉬어야만 하는 시간에도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것. 그러니 해가 지면 그런 부담을 내려놓자. 지난여름, 해가 떠 있던 오랜 시간만큼 뜨겁게 살았잖니. 어쩌면 겨울이 한 해의 끝과 시작인 것은, 광합성이 가능한 시간이 줄어드는 만큼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앞두고 에너지를 비축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내 멋대로의 의미부여라도 좋다. 그러니 해가 떠 있을 때만 열심이기를. 그리고 해가 지면 나를 놔줄 수 있기를. 이맘때에 이런 생각을 품어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은데, 어쩌면 보람의 측면에선 이것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지내고 있는 인천은 비교적 서쪽이라 해가 늦게 지는 곳이네. 다른 곳보다 열심일 시간이 아주 조금이지만 더 부여될테니, 그만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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