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당시 나의 아이돌은 이루마였다. 희한하게도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모두 피아노로 예고 진학을 희망하고 있었기에 우린 모두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에 함께 매료됐었다.그렇게 피아노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놀다 보니, 덕분에 가까이에서 그럴싸한 연주를 자주 들을 수 있었고 가끔은새로운 악보를 친구들로부터 손쉽게 얻기도 했다. 물론 그중에서 나는 실력으론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지만, 피아노로 대학 진학까지 꿈꾸며 연습하는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그저 괜찮은피아노 연주를 가까이, 그리고 자주 들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을 뿐.
그때, 그렇게, 열심히 손에 익을 만큼 연습했던 곡들이 있는데, 지금도 우연히 피아노 앞에 앉게 되면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얼추 그럴싸하게 들릴 수 있을 만큼 몇 곡 정도는 연주해 낼 수 있다. 거의 2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기억이 나는 것 보면, 역시나 몸에 익은 것들이 기억하는 저장소는 어디 다른 곳에 있는 모양.
성인이 되고 난 뒤에도, 가끔씩 주말에 집에 혼자 있을 때면 피아노를 치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외웠다 생각하고 있는 곡을 악보를 보면서제대로 쳐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막상 악보를 보며 눈과 손을 오가다 보니그간 내가 엉망진창 얼렁뚱땅 치고 있는 부분들이 꽤 많았다는 것을깨달았다. 아주 많은 유연함을 발휘했달까. 그저 같은 코드이면 되겠거니 하고 내 멋대로 반주를 지어낸 것들도 있었고.
그러나 교정해 보자는 결심과 달리, 한음한음 정확하게 두드리며 넘어가려 하니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러다 이내 싫증이 나 피아노 뚜껑을 덮곤 했다.그 이후에도 가끔 피아노를 칠 때면, 외워둔 곡일지언정 한음한음 집중하며 교정하며 쳐보려고 애를 썼지만 그럴 때마다 어이없게도 제대로 치기는커녕, 다음 음이 무엇이었는지 외려 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손가락은 멈춰버렸고, 몸이 기억했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코드조차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더 엉망이 되어버린, 연주라고 하기도 어색한 두드림.
그날 이후로 나는 '잘 쳐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고, 원래의 내 방식대로 얼렁뚱땅 연주를 이어가기로 했다. 가끔 운 좋게 머릿속에 악보의 일부가 떠오르면 즉각적으로 수정하겠지만, 굳이 애써 모든 음을 악보에 맞춰 연주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이 덜 부담스러웠고 언제든 오랜만에 앉아 피아노를 칠 때면 머리보다 손이 기억하는 음에 절로 어깨를 앞뒤로 흔들어가며 연주를 하곤 했다. 그래, 내가 뭐 전공자도 아니고 전문 연주자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애써서 딱 맞춰서 쳐야 할 필요가 있나.
직장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매번 낯설면서도 반복되는 일상이 막막하다. 그러나 이 오랜 습관이 무언가 내 머리보다 몸으로 기억하는 패턴을 내 몸 안에 만들어 놓았을 테니, 하루하루를 한음한음 정확히 두드리며 살지 않으려 한다.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보면, 남들 눈에는 크게 티 나지 않아도 나름 전체를 흘겨들었을 때엔 그럴싸한 음악이지 않을까. 물론 나 혼자만 어깨를 앞뒤로 들썩이겠지만.정확하게 한음한음을 떠올리며 치려다가는 스텝이 꼬이고 다음 단계가 절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포기까지 이어지고 싶진 않거든.
그러니, 오늘 이렇게 무사히 살아 돌아왔듯 나는 내일도 그저 내 몸이 가는 대로 실수를 하면 실수를 하는 대로 자연스럽게 다음 음계로 손가락을 옮겨가려 한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삶은 정답이라 할만한 악보도 없으니까.
출근 전 아침마다 화장을 하면서 항상 교양에 가까운 예능의 편집본들을 틀어놓는다. 그러다 얼마 전 우연히 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유퀴즈에 출연한 영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을 한 줄 평으로 말해달라는 질문에, 그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 전체는 되는대로'라고 답했다. 어차피 인생 전체는 목적을 가지고 전력투구를 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고. 인간이 그나마 노력을 기울여서 할 수 있는 것은 오늘 하루 성실한 것이라고.
그 영상을 보고, 오랜만에 나의 피아노 연주가 떠올랐다. 그래, 되는대로 연주하자고. 피아노 앞에 앉아 자동적으로 뚱땅뚱땅 건반을 대충이지만 그럴싸하게 두드리려는 것만으로도 성실한 것 아니냐고. 한음한음 정확하게 두드리려니 곡은 엉망이 되었고 나는 이내 지쳐버렸다. 그러니, 나는 내일도 그리고 주말이 지나 찾아올 다음 주도 그저 출근해 피아노 앞에 앉아 습관처럼 두드려온 내 방식대로의 곡을 연주한다. 얼렁뚱땅 넘어가더라도 어떤가. 성실하게 또 이렇게 건반 앞에 앉았거늘.
실수에도 당황하지 않고 다음 건반으로 손가락을 옮겨간다. 그렇게 중도포기하지 않고 연주를 끝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피아노 앞에 앉듯, 내일도 길을 나서려 한다. 성실하게, 그나마 이것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
얼렁뚱땅 연주하는데도 사람들이 어떨 땐 박수를 쳐주곤 했다. 그런 날도 가끔은 있을 테니오늘 익숙해진 하루치만큼 내일 더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건반 앞에, 내 몫으로 주어진 자리 앞에 가 앉는다. 얼렁뚱땅 연주하더라도 좋으니, 지치지 않기를. 그렇게 쌓여온 자연스러운 연주야말로,악보는 없지만 언젠가그럴싸한 음악이 될지도 모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