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야 걸린다

걸리고 걸러지고 걸리는

by autumn dew

일교차가 심하다. 출장을 떠나오면서 어떤 옷들을 챙겨야 하나 고민했다. 이제는 습관화된 출장이지만 뚜렷하지 않은 계절에는 짐을 싸기 위해 옷장 문을 열어놓고 한참을 고민한다. 그렇다고 옷을 사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일교차가 심할 때 입을 수 있는 알맞은 옷이란 없으니까. 가지고 있는 것들로 온도에 맞추어 걸치거나 벗는 것이 최선이다.


하루 중 대부분을 보내는 장소가 볕이 잘 드는 양지라면 지금의 이 환절기가 다소 덥게 느껴질 테지만, 반대로 음지라면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크게 실감하지 못할 것이다. 음지는 여전히 서늘하니까. 그러니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기 위해서는 지금 내가 어느 곳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그리고 몸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도 가봐야 한다. 그래야 지금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있다.



출장지에 가더라도 실내에 콕 박혀있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저 근무하는 장소의 주소지만 잠시 바뀌었을 뿐. 다행히 이번 주 숙소의 근처에는 개천 옆 산책로가 길게 조성돼 있어 처음 도착한 날 저녁부터 거의 매일 밤을 걸었다. 마음의 요동은 있어도 몸의 요동은 없이 보낸 하루의 끝. 그렇게라도 움직여야 가라앉은 무언가가 떠오를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가자, 그러다 내일은 저기까지, 그러다 마지막에는 산책로의 끝을 찍고 돌아왔다.


숙소는 높은 층의 호실을 배정받았지만 매일 아침 창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내내 뿌옇기만 했다. 아침마다 틀어놓았던 뉴스에서는 계속 공기의 질이 탁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날마다 걸었다. 미세먼지를 걸러내지 못하더라도 다른 것 하나는 걸리겠지. 걷느라 더 걸리는 시간, 그리고 다행히 부유하던 생각들도 어딘가에 걸렸다. 어떤 것은 걸러지고 어떤 것은 걸렸다.




성인이 되고도 자가용이 없던 때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보여행을 했고, 그러므로 도보여행을 즐긴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여행은 늘 옳았으며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뿐이었으니. 출장을 끝낸 뒤, 곧 이은 주말을 부모님과 보내려고 부모님께 인근 기차역으로 올 수 있는 기차표를 끊어드렸다. 출장지도 출장지였지만 부모님이 오시기로 한 기차역 인근은 아주 예전에 동생과 함께 기차를 타고 도보여행을 왔던 곳이었다. 차를 갖고 왔지만 조금만 다녀도 예전에 와본 곳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걸었기에 기억하는 것이다. 아마 이전에 차로 스쳐 지나갔다면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많이 흘러 주변이 많이 바뀌었음에도 걸음의 기억은 눈의 기억과 달랐다. 분명 스쳐간 곳이었다는 사실을 몸 어딘가는 기억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던 때에, 출장으로 첫 발령지를 간 적이 있었다. 자가용 없이 사회초년생으로 3년을 보냈던 곳에, 직접 운전을 해서 왔다는 사실만으로 감회가 새로웠다. 금의환향한 기분이랄까. 그렇게 업무를 마치고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워, 예전에 퇴근을 하고 돌아다녔던 길을 차로 다시 가보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가는 길마다 인도 위를 걸어가고 있는 어린 날의 내가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차에서 한참을 울었다. 차 안에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울어도 괜찮았다. 시야가 흐려지고 혼란한 마음이었지만, 그럼에도 내비게이션은 필요 없었다. 그저 내 눈에 아른거리는 나를 따라가면 될 일이었다. 길마다 사회초년생의 어린 내가 눈에 걸렸고, 그렇게 울고 돌아오니 이유는 모르겠으나 속이 후련했다.


걸으면 차로 가는 것보다 많은 것이 걸린다.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쓸데없던 것들은 걸러지고, 의미 있는 것은 걸린다. 그 현상이 언제 발생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을 위해, 아니 설령 그날이 없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걸음마다 내 몸에 새겨지고 있다.




퇴근하고 사택 주변을 걷고 뛰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내게, 친한 후배가 사택 인근 헬스장을 등록해 같이 다니자고 했다. 날씨가 추울 때는 따뜻하게, 또 더울 때는 시원하게 운동할 수 있지 않냐고 했지만 그럼에도 내 눈앞의 장면이 바뀌는 당연한 즐거움을 포기할 수 없어 완곡히 거절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어느 때를 지나는지 모르잖아. 지금 양지에 있는 것일 수 있으니 음지에도 가봐야 하고. 음지에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양지에도 발을 들여봐야지. 계절을 실감하려면 눈앞의 장면을 바꿔 보아야 한다. 볕이 있는 곳에도 가보고, 볕이 없는 곳으로도 가보고 싶다.


사택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는 재개발을 독려하는 다양한 건설사들이 설치한 현수막들이 여럿 걸려있다. 퇴근 후 아파트 단지 주변을 걷다 현수막들을 보며 생각한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 우연히 다시 오게 되는 아주 먼 훗날을.


생경한 모습으로 바뀐 추억 서린 길을 걸어보고도 싶겠지만, 그럼에도 무조건 차를 갖고 와야겠다고 다짐한다. 첫 발령지를 갔던 그때처럼 눈앞에 내가 걸려 눈물이 왈칵 터질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