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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yj Sep 21. 2023

정신과

 의사는 상냥하지만 나와의 지리한 인연처럼 건조하다. 처음 진료 때는 몸을 기울여 이야기도 들어주었지만 지금은 목소리조차 나를 향하지 않는 것 같다. 지친 걸까? 아니면 나처럼 줄어든 세로토닌을 우울로 채우는 중일까? 생각해 보면 그도 노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얼굴에도 의사 가운에도 노인의 게으름이 곳곳에 묻어 주름 투성이다. 노인은 부정적인 것보다 긍정적인 정서를 좋아하고 그 모습을 얼굴에 드러낸다. 마치 아이처럼 숨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의사는 나에 대한 마음도 숨기지 않는다. 종일 징징대는 환자들의 역겨움을 참으며 같은 말을 수십 번 반복해야 하는 그 마음을 이해한다. 그래서 나는 섭섭하지 않다. 


 면담은 5분을 넘기지 않았다. 잘 있는지? 요즘 달라진 것이 있는지? 약을 잘 먹고 있는지? 그런저런 이야기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 나는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어요.', '달라진 것은 없어요.', '약은 빠뜨리지 않고 먹고 있어요.' 그것으로 끝이다. 그는 나에게 기분이 어떤지, 회사는 불편하지 않은지, 요즘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지 묻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얼굴만 봐도 아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이런 건조한 진료와 나아지지 않은 기분에도 나는 20년째 이 병원을 다니고 있다. 의사도 나도 더 이상 도와줄 것도 받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누구도 관계의 종료를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도 창밖을 보며 뛰어내리고 싶을까? 사람들이 역겨워 피하고 싶지 않을까? 같은 일을 수십 번 반복하며 자신을 혐오하고 있을까? 그도 몰래 약을 먹으며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 척 허세를 부리고 있지 않을까? 정말 물어보고 싶지만 나는 그가 처방해 준 약을 받고 병원을 나설 뿐이다. 정신과약은 약국에서 조차 함께 어울려 팔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약을 받아 나서는 길은 더욱 쓸쓸하다. 


 나는 의사에게 그냥 거기에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다. 기나긴 시간 동안 짧은 순간이라도 내게 내어 주고, 관심 없던 말이라도 들어주며 세상으로 나갈 약을 쥐어 줘서 고맙다고. 오늘 전하지 못한 그 말을 다음에는 전하고 싶다. 그러니 우리가 마주할 시간이 조금은 더 길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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