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추억 속에 검정고무신

아버지와 나, 그리고 아들의 발자취

by 최경열

울 아버지 세대가 짚신을 신으셨다면, 저와 제 친구들은 고무신 세대였죠. 그리고 제 아들은 이제 세계적인 브랜드의 신발을 신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추억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새 고무신이 너무 신고 싶어서 일부러 칼로 흠집을 내 찢어지게 만들었다가 어머니께 죽도록 맞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부안 장에 가실 때면 제 발 사이즈를 재신다고 보릿대를 잘라 측정하곤 하셨어요. 터덜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부안 장에 도착하면, 이미 보릿대는 주머니 속에서 부러지고 휘어져 있기 일쑤였죠. 신발 가게에 들어선 아버지께서는 대충 "십 문 칠 주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사 온 새 신발은 늘 발에 맞을 리 없었어요. 손가락 하나가 들락날락할 정도로 컸죠. 아버지는 신발 앞 코를 눌러보시며 "발은 금방 크니 대충 신어라" 하셨습니다. 저는 다음 장날까지 기다려 신발을 바꾸러 갈 엄두도 못 내고, "아버지~ 기워 떨어진 양말 신고 신으면 대충 맞아요" 하며 머리맡에 두고 잠이 들었습니다. 생고무 냄새마저 상큼했던 그 밤, 하지만 다음 날부터는 헐렁대는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녀야만 했습니다.

image.png

고무신도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저는 검정 고무신보다 흰 고무신이 너무 갖고 싶었어요. 하지만 흰 고무신은 때가 쉽게 타고 검정 고무신보다 질기지 않아서 어른들만 신고 다녔죠. 신발 문수만 다를 뿐, 일률적인 검은색이라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면 늘 남의 신발이었습니다. 하얗게 반짝반짝 빛나는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던 정달원이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그리고 운동화를 신고 다니던 갑돌이는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아~ 얼마나 부자였으면…'

검정 고무신은 얼마나 질겼던지, 입으로 물어뜯어도 금방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새 신을 신고 싶으면, 여하튼 열심히 뛰어다녀 자연 마모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죠. 대항리에서 지서리까지는 5km, 십 리가 넘는 거리였습니다. 저는 그 질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딱 세 번만 결석했고, 졸업식 때 6년 정근상 상품으로 국어 대사전을 받았습니다. 요즘 스마트폰처럼 신발 인기가 고무신에서 운동화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운동화 한 켤레를 얻어 신는 것이 그 당시 아마 제 평생 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겁니다. 매번 아버지께서는 "지금 신고 있는 신발 떨어진 다음에 운동화 사줄게"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또 시멘트 담벼락에 박박 문질렀습니다. 지금 같으면 아스팔트에 질질 끌고 다니면 금방 떨어지는데, 그 당시는 지서리에서 대항리까지 전부 흙과 자갈 길뿐이라 문지를 곳은 해수욕장 집과 복지호텔 올라가는 시멘트 층층 계단이 전부였습니다. 당시 복지호텔에 살던 장옥희는 운동화를 신고 다녔는데, 층층 계단에서 신발을 문지르고 있는 저를 이해 못 하고 "왜 신발한테 화풀이하냐"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창피했던지….

얼핏 봐선 표시가 잘 안 나지만, 고무신도 제 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집 신발은 제대로 짝이 맞는 게 없었어요. 말랑한 밑창을 잘 찾아보면 맞는 것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신발을 벗어야 하는 잔칫집이나, 여럿이 모이는 곳에 한번 갔다 오면 남의 신발은 그렇다 치고 여하튼 짝을 맞춰 오는 적이 드물었습니다. 우리 집에서 기르던 똥개 이름은 무조건 '메리'였습니다. 그 메리는 얼마나 영리했던지 동네 사랑방에서 신발을 바꿔 오면 잽싸게 아버지 신발을 물어왔습니다. 또 추운 겨울 사랑방에 놓인 신발 중 메리가 깔고 앉아 따뜻해진 것은 울 아버지 것이었습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7rgmj77rgmj77rgm.png

학교에서 놀이 중 최고 인기 종목은 모래밭에서 신발을 뒤집어 자동차 놀이하는 것이었고, 신발 높이 차올리기였습니다. 땄다, 뺏기기를 몇 번 하다 보면 짝 맞춰서 집에 돌아간 적이 거의 없습니다. 참외 서리하다 들키면 무조건 신발 벗어 손에 들고 튀어야 합니다. 땀에 잘 미끄러져서 뛰기도 힘들 뿐 아니라, 뛰다가 그냥 확~ 벗겨져 버리면 환장합니다. 그거 주우러 돌아갔다간 바로 그냥 멱살 잡히니 신발 하나 버릴 것 각오해야 했죠.

Gemini_Generated_Image_tbcgb6tbcgb6tbcg.png

그때 고무신 중에 인기 있었던 상표가 바로 '타이아표 진짜 고무신'이었습니다.

왕자표, 범표도 있었고 기차표 고무신도 있었는데, 대항리 우리 집은 전부 타이아표였습니다. 여자 타이아표 검정 고무신은 가운데에 타이어가 아닌 꽃이 그려졌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엿장수조차 검정 고무신은 안 받고 흰 고무신만 받았습니다. 얼마나 엿이 먹고 싶었는지 대항리 외갓집에 가서 할아버지가 팽나무 밑에서 주무시고 있던 사이 흰 고무신과 엿을 바꿔 먹어 할아버지와 엿장수 간 다퉜던 적도 있습니다.

image.png

저는 친구들과 싸울 때 고무신을 요긴하게 사용했습니다. 힘이 좀 부치면 고무신을 뻗어 따귀를 한 대 갈기면 여지없이 이겼죠. 그러면 영배 볼에 (약간 뻥을 섞으면) 타이아 고무신 상표가 찍힙니다. 옹기골 사는 영배나 운산리 사는 행노, 저한테 검정 고무신으로 많이 맞았을 겁니다. 지금이야 제가 영배나 행노보다 작지만, 그 당시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해수욕장에서 자미동 들어가기 전 개울은 신발이 떠내려갈 정도로 물살이 셌습니다. 맨발로 건널 정도였지만, 거기에는 물고기가 많이 살았습니다. 개울을 진흙으로 막고 검정 고무신 두 개를 맞대고 물을 퍼내기 시작해서 한 시간 정도 퍼내면 붕어와 미꾸라지가 득실득실 나왔습니다. 하굣길에 들러 빈 밴또(도시락)에 이빠이(가득) 담아가면 어머니는 묵은 김치에 붕어 몇 마리 집어넣고 푹 끓여 저녁을 내놓으셨습니다. 비록 보리밥이지만 배 터지게 채웠죠.

Gemini_Generated_Image_gr8e6ugr8e6ugr8e.png

"새 신발 신고 뛰어보자 폴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작은 일 하나에도 한없이 기뻐했던 어릴 적 경열이의 모습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