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갯벌체험
70년대의 변산해수욕장은 물 반 사람 반이었다. 서해안에서 유일하게 물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대천과 변산해수욕장뿐이었다. 1933년 일제에 의해 개방된 국내 최초 해수욕장이었다. 하루 20만 명이 몰렸다는 기록도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인파였다. 그 당시 부안군 전체 인구가 16만 명이고 2024년 현재 인구는 5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해수욕장 개장은 무장공비들의 침투로 인하여 지역과 시기가 제한이 되어있었다. 전국의 해안가는 전투경찰이나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로 인하여 극히 일부 해수욕장만 개장하여 피서객이 몰려왔다. 여름이 되면 변산해수욕장 주차장이 만차가 되었다. 비포장 도로 인 해창까지 차량이 줄을 이어졌다. 변산은 이름이난 해수욕장으로 전국에서 몰려왔다. 납량특집 공개방송하는 날은 해안은 콩나물시루였다. TV는 없고 라디오만 듣던 시절이었다. 좋아하는 유명 가수들을 딱 한번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전북가수 송대관의 "쨍하고 해 뜰 날" 이 바다에 울려 퍼지면 비키니를 입은 남녀관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방송이 끝나면 야구장에 관객 빠지듯 하나 둘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그렇게 해변은 8월 중순이 되면 해수욕장은 텅 빈 운동장이 되어 버린다.
가을이 되면 수많은 인파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 마저 파도에 씻겨 흔적도 없다. 여름의 열기와는 대조적이다. 동네 주민 한두 사람 지나갈 뿐 인적이 끊긴 지 오래되었다. 해안 초소에서는 전투경찰이 M1 소총과 망원경으로 해얀을 경비하고 있었다. 밤이 되면 써치라트로 해안가를 불을 밝혔다. 해수욕장의 먼바다는 고운 모래 덕분에 썰물이 되면 소라, 해삼, 배꼽(골뱅이) 각종 조개들이 갯벌에 널려있었다. 조개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여름의 사람의 온기인지 몰랐다. 사람의 냄새를 제일 좋아하는 고기는 상어이고 다음에 갈치 그리고 소라와 해삼이라 한다. 물 반 사람반인 갯벌은 물 반 조개 반으로 바뀌었다. 갈미조개, 개량조개, 바보조개, 삼베조개, 노랑조개, 명주조개, 새조개, 해방조개가 수도 없이 묻혀있었다. 사실 조개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조개이다. 조개의 혀가 새의 부리를 닮았다고 해서 새조개라고 불리는 지방도 있다. 이 조개는 전국 갯벌에 분포가 되어 있어 이름도 지역마다 다 다르다. 변산에는 는 해방조개라고 불렀다.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직후 가난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마을 주민에게 먹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조개 이름을 해방 조개라고 불렀다
갯벌에 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버글버글 하였다. 네발 달린 갈쿠리로 한번 긁을 때마다 수십 개의 조개가 뻘 위로 솟아 올라온다. 한 시간만 긁어도 한 푸데를 캘 수 있다. 케도 케도 조개는 줄어들지 않는다. 산란기에 닭이 알을 낳듯 계속에서 뻘 속에서 생산이 된다. 보름간격으로 돌아오는 사리 때는 해방조개를 캐러 오는 마을사람들이 몰려와 바닷가 갯벌을 진을 치고 있었다. 운산리, 지동리, 지서리, 지남리 주민들은 집안식구들이 동원되어 리어까(REAR CAR 후방차, 일본식 발음)를 끌고 와 몇 푸데를 긁어갔다. 전화기도 없던 시절인데 산너머까지 소문이 돌아 내변산 중계 주민들도 몰려왔다. 해방조개와 더불어 변산의 바지락도 맛이 있다. 해방조개는 영글기 전에 보드랍고, 바지락은 통통하게 영글어야 국물도 맛있고 씹는 촉감이 좋았다. 껍질을 까서 날것으로 무와 초장에 묻혀 먹으면 최고의 반찬이었다. 말려서 부안장에 팔기도 하고 도시락 반찬으로 인기가 좋았다. 풍부한 영양과 단백질을 제공하여 주었다. 해감이 잘 되지 않아 뻘이 서그럭 거려도 쫄깃한 맛으로 그냥 넘긴다.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난적이 없었다. 의학적인 근거는 없지만 할아버지께서 뻘 속에는 철분과 칼슘이 풍부하다면서 서그럭 거려도 괜찮다고 하셨다. 변산반도 주민이 머리가 좋고 뼈가 튼튼하여 건강한 이유가 뻘 속의 해방조개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