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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열 Mar 25. 2024

12화 겨울바다

소나무 숲

겨울이 되면 변산해수욕장은 더욱 썰렁하다. 모두가 떠난 폐광촌과 같았다. 부안 읍내에서 1시간 이상 꼬불꼬불한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도달할 수 있는 산간벽지였다. 자동차는 거의 왕래가 없고 완행버스인 안전여객과 전북여객이 번갈아 가며 하루에 두어 번 왔다 갔다 한다. 노루목에서 곱고 하얀 모래를 퍼 날라는 도락구(truck 트럭, 일본발음)가 신장로를 흙먼지를 내면서 달리고 있다. 노루목의 모래는 건축용 모래로 최고의 품질로 평가받아 건축용으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당시는 노루목은 해수욕장이 아닌 산업용 모래 채취하는 장소였다. 격포 채석강과 수락동 바닷가는 얼씬도 못하였다. 무장공비 10명을 소탕하였다. 그때는 관광지가 아닌 비무장지대와 같았다.

  변산 해수욕장은 임시로 지은 허름한 집들은 세찬 겨울바람에 반쯤 날려 보냈다. 여름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도 어둠으로 변했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에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음악과 함께 광란의 춤도 고요한 아침으로 바뀌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던 식당이나 숙박업도 간판이 떨어져 덩그러니 덜렁거리고 있었다. 산등선에 지어진 임시 디젤 발전소도 문을 닫아 전기와 수도도 끊긴 지 오래되었다. 철롱대의 전깃줄은 끊어져 칡넝쿨처럼 엉켜있었다. 전쟁터에 폭격을 맞은 마을과 같았다. 확 트인 백사장과 바다는 정적만이 맴돌고 있다. 아름다운 낙조도 저녁이 되면 무서움이 엄습해 온다. 귀신처럼 소름 돋는 여자 울음소리도 들렸다. 고양이 울음소리였다. 들 고양이가 빈집의 주인이 되었다.

  붉은 노을이 지고 있는 텅 빈 바닷가에 이상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얀 물거품이 일고 있었다. 큰 파도는 아니지만 바람에 날리는 해무 같기도 하였다. 너무 신기하여 가까이 가봤다. 하얀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고 춤을 추고 있었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바닷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는 휩사 전설의 고향에서 나오는 귀신과도 같았다. 춤을 추다가 주문도 외우고 있었다. 귀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직감하였다. 안도의 숨을 쉬었다. 무당이었다. 굿을 하고 있었다. 한여름에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넋을 건져 한을 풀어주는 무속신앙이었다. 영혼을 달래주어 집으로 모셔와 제를 지내어 승천시키는 굿이었다. 무당 옆에 40대로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이 울고 있었다. 한 여름에 바다에서 아들을 잃었다. 옆에는 그릇에 쌀이 반쯤 담겨있었다. 그릇은 죽은 사람이 사용했던 것이다. 쌀이 움직이거나 바람에 머리카락이라도 날아와 그릇에 담기면 혼이 들어왔다고 한다. 70년경 바닷가나 강가에서 익사 사고가 많았다. 바닷가에서 넋건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할머니는 물가에 가지 말라는 점괘가 나왔다면서 훈계가 아니라 세뇌를 시켰다. 물에는 물귀신이 있다고 했다. 바닷가는 무서웠다.

변산국민학교는 변산면 소제지 지서리에 있었다. 대항리에서 지서리 까지는 5km 넘는 먼 거리였다. 꼬불꼬불한 등굣길은 초등학생이 다니기는 멀고 험난한 길이였다. 제일 무섭고 피하고 싶은 등굣길은 해수욕장 소나무 숲이었다. 수령 100년이 넘는 아름드리 해송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풍성한 솔잎에서는 바닷바람과 함께 솔향기가 풍기고 있었다. 바닷가 소나무 아래 모래 밭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 좋은 장소를 차지하기 위해 싸움도 많이 한다. 임시 유흥주점이나 나이트클럽을 개업하면 대박 나는 장소이다. 북적이는 인파는 많았어도 치안과 안전요원이 없었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다. 조폭들의 이권으로 칼부림도 있었다. 무법천지였다. 사망하면 시체도 유기하여 모래밭에 묻어 버린다. 

 변산반도에서 사랑하는 연인들끼리 아름다운 추억도 많지만 슬픈 이야기도 있었다. 헤어진 후 잊지 못하여 겨울바다에서 목이 메어 울다가 소나무 아래에서 목을 메어 자살한 여자도 있었다. 가족이 와서 혼을 달래주면서  죄 없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버렸다. 소나무는 해풍을 맞아 더 꿋꿋하게 자라 벗겨진 소나무 껍질 사이로 많은 양의 송진이 흘러나왔다. 슬픈 소나무 눈물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송진이 약이 된다면서 채취해 갔다. 몇 년이 흐른 뒤 소나무의 상처는 깨끗이 아물어 흔적만 남아 있었다. 

 세찬 겨울바람과 파도의 영향으로 모래 언덕의 지형이 바뀌기 시작했다. 자갈밭이 드러나고 앙상한 나무뿌리가 드러났다. 사막에서 미라가 발견되듯 소나무 언덕에서 유골이 발견되었다. 전쟁 때 사망한 전사자인지, 물에 빠진 익사자인지, 조폭에 의한 사망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소나무 숲과 모래밭에는  으스스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여름에는 사건사고와 도박이 성행하면서 소나무 숲에는 돈도 넘쳐났다. 그 당시는 은행도 멀었고 카드도 없었고 오직 현금으로 거래가 되었다. 지폐보다 동전 거래가 많았다. 조폭들의 눈먼 돈도 거래가 되었지만 피서객이나 장사꾼이 흘리거나 잃어버린 동전들도 많았다. 겨울철에 사람들이 떠난 빈 곳에 회오리바람이 불면 모래는 날아가고 쇠붙이와 동전은 남는다. 금속 탐지기기 필요 없었다. 시계와 귀금속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람의 혜택이다. 매서운 바람이 부는 등굣길은 무섭기도 하지만 노다지 캐는 날이다. 바다에서 물고기 길목을 잘 아는 어부가 유능한 어부이다. 우리는 사람이 몰렸던 곳을 정확히 기억했다. 광부가 광맥을 찾듯 원주민에게 주어진 특혜이고 노하우다. 호주머니에 동전이 수북해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등교시간을 훌쩍 넘겨 버릴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학교는 공치는 날이다. 지각했다고 두들겨 맞는 것보다 결석하는 게 차라리 낫다. 우리는 중간치기라 했다. 어머니는 도시락까지 싸주면서 학교 잘 갔다 오라 하고 선생님은 장거리 통학하면서 날씨 탓도 있지만 농번기에 결석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라 확인도 안 했다. 전화도 없어 확인할 수단이 없다. 우리는 가방을 둘러메고 학교대신  빈집에 숨어 들어간다. 도시락까지 까먹고 거기서 눈치 봐가며 하교시간을 맞춘다. 빈집에 들어가 서로 주어온 돈을 세기 시작한다. 동전은 1원, 5원, 500 환, 50원, 100원 5종류다. 합치면 수백 개가 된다. 짜장면 한 그릇에 300 원하던 시절이므로 큰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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