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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Jun 27. 2024

산책

사랑에 대하여 5: 마무리하며

  늦은 밤, 차분하게 쌀쌀한 공기. 낮에는 덥지만 큰 일교차 탓에 여전히 밤은 차갑다. 외투를 걸치고 나와서 걷는다. 이어폰 속에 흘러나오는 가을방학의 근황. 

참 부질없다.


 외진 곳에 멈춰 담배를 꺼내 물면서 생각한다. 지나가는 연인들을 저주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정말 그렇지 않은가. 그들 중에 과연 몇 쌍의 연인들이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럼 결혼은 정말 궁극적인 목표인가? 쓸데없는 생각이다. 망상에 더 빠지기 전에 담뱃불을 끄고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언제부터였을까. 무작정 걷는다. 귓속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 


 “한 사람이 떠나갈 땐 참 많은 게 떠나. 그댄 잘 지내나요, 난 별일 없는데.”


 한 벤치 앞을 지나간다. 

 맞네, 여기였는데.


 나와 Y는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다. 여름의 잔향이 남아 여전히 더운 낮이지만, 밤공기에서는 조금씩 가을이 느껴진다. 끝이 다가왔다는 걸 전혀 못 느끼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을 못 했을 뿐. Y는 그런 애였다. 당시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얄밉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연락 안 하니까 어땠어?” 


 내심 조금은 허전했다는 답변을 기대하면서 건넨 첫마디였다. 물론 기대했던 답변을 받지는 못했다. 애초에 이렇게 만날 필요도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난 뒤였으니 노력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 보자는 명분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그 뒤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옷으로 닦아내면 울고 있다는 걸 들킬까 봐 어둠이 가려주기를 가만히 바라고 있었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나 자신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종국에는 훌쩍거리면서 후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헤어지는 걸 후회해서 나중에 나에게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진심이 아니라 장난으로 받아들이길 바랐기에 억지로 웃으면서 말했다.

근데 그 말에 Y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걷다 보니 다리 위다. 옆으로는 왕복 8차선 도로에 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고, 밑으로는 검은색 한강이 흐른다. 가로등과 자동차가 강에 반짝이는 잔물결을 만든다. 하늘에는 조금 자란 손톱 같은 달이 떠있다. 예쁘다. 속삭이듯이 혼잣말로 내뱉는다. 그러다 문득 왜 달을 예쁘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해졌다. 윤슬은, 별은, 무지개는? 왜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예뻐하며 좋아할까. 과거에는 저런 것들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아니면 생존에 도움이 되는 특징들을 저것들이 우연히 가지고 있는 걸까? 세상에는 이유도 모르고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예쁘다 생각하는 것도 그런 것인가? 또 쓸데없는 상상이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나를 망상에서 꺼내 준다.


 잘 지내?


 한숨을 크게 한 번 쉰다. 너에게 연락을 받는 게 저번이 정말 마지막이었으면 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태연하게 안부를 묻는 저 세 글자는 보면 볼수록 괘씸하다.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몇 번째 안 듣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아직까지도 힘들어하는 게 너무 바보 같아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경질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닫는다. 그리고 다리 중간에 연결된 공원으로 들어간다. 다리 밑의 공간을 지나 어울리지 않게 전망대 망원경이 있는 곳으로 간다. 여기는 뭐 볼 것도 없는데. 처음 오는 곳도 아닌데 괜히 망원경한테 시비를 건다. 저 멀리 강 위로 연결된 철도를 따라 창문마다 밝은 빛을 내는 지하철이 지나간다. 담배를 꺼내서 물고 라이터를 가져다 댄다. 한번. 마지막 숨을 토해내듯 불꽃이 반짝 빛나고 꺼진다. 아무리 애써봐도 켜지지 않는다. 여기는 주변에 불을 빌릴 사람도 없는데. 무슨 이런 영화 같은 순간이 있지, 하고 허탈하게 웃는다.


 너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네가 싫어했던 게 정말 담배 냄 새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내 옷이든, 손가락이든, 어딘가에서 담배 냄새를 찾아내면 잔뜩 삐진 얼굴을 하고 나를 노려봤다. 물론 그게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아니었다. 너는 나를 너무 사랑했었다. 정확히 따지면 나의 여러 모습 중에 딱 한 모습을 많이 사랑했다. 그래서 너 앞에서는 항상 그 모습이어야만 했다. 네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 너와 오랜 시간 붙어있을 때는 그게 문제였다. 다른 내가 자꾸 얼굴을 비춰서, 너는 그럴 때마다 특유의 쓴 표정을 했다. 그 표정을 보지 않기 위해,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언젠가 네가 그런 말을 했다. 자신에게 서운한 점이 없는 게 서운하다고. 나는 너에게 한 모습만 보여주기 위해 서운할 틈이 없었다. 그때 Y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Y였다면 그때의 나를 이해해 줬을 텐데. 그니까,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Y를 이해했을 텐데.


 너는 한번 헤어지면 세 달이고 여섯 달이고 힘들어한다고 했었다. 그게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울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아프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많이 줬다는 뜻이니까. 나는 그때 이후로, 그리고 힘들어하는 너를 보니까 더 마음을 주기가 어려워졌다. 헤어진다는 건 슬픈 거니까, 언젠가 모두 헤어지니까, 다 부질없으니까.


 강으로 가깝게 다가간다. 발목을 타고 강의 찬기가 온몸을 감싼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달빛이 만든 윤슬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가고 조용하다. 진동이 한 번 더 울린다.


 불편했으면 미안, 잘 자.


 너는 앞으로 나를 잊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럼 또 사랑하고 슬퍼하고 헤어지겠지. 그러고는 그 사람에게도 이렇게 연락을 보낼까. 사랑을 많이 준다는 건 축복일까, 불행일까. 갑자기 윤동주 시인의 자화상이 떠오른다. 강물을 바라본다.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는 탁한 이 물에 내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됐다, 하고 돌아선다. 그 앞에는 달이 떠 있다. 나의 그림자가 강물 위로 출렁인다.


 알고리즘을 타고 가을방학의 취미는 사랑이라는 노래가 재생된다. 새벽 공기에 안 어울리는 신나는 노래이다 싶어 다음 버튼을 누르려다 그대로 둔다. 노래가 끝나간다. 마지막 가사를 곱씹는다.


그녀의 눈에 비친 삶은 서투른 춤을 추는 불꽃 

따스함을 전하기 위해? 재를 남길뿐인데? 

미소가 어울리는 그녀 취미는 사랑이라 하네


 집 앞에서 다시금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의 가스가 다 되었던 것을 까먹고 다시금 라이터를 켠다. 위태롭게 불꽃이 일렁인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불꽃이, 서투르게 일렁인다.



by.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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