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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감각하는 방향

사랑에 대하여 4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회고록이다. 작가가 경비원으로 일하며 생각하고 느낀 것들의 조각이 잔뜩이다. 형을 잃고 잡지사를 그만둔 작가는 도피하듯 경비원이 된다. 그러나 뜻 밖에도 그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함과 동시에 삶이라는 가장 복잡한 일까지 해낸다.


예술 작품을 곁들인 예쁜 성장기를 읽는 듯했다. 백지상태로 책을 마주하기 위해 노력하다 어쩔 수 없이 읽어버린 한 줄 평 몇 개는 그 예쁨을 좋아들 한다. 하지만 나는 초장부터 이기적인 마음을 가득 품고 시작했다. 작가의 상황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가 유명한 잡지사를 그만두고 다시 찾은 직장은 공무원이었다. 또 형의 죽음과 이어진 가족의 슬픔이 예술작품에 빗대어질 정도로 고귀하고 우아하게 묘사된다. 고통마저도 성숙하고 보기 좋게 적어놓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질투 났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못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박물관에 ‘놀러 간다’는, 쉽게 이해받지 못하는 내 취향 덕이었다. 왠지 집에만 있기는 싫을 때 갔던 박물관을 또 가고, 봤던 것을 또 본다. 조용한 웅성거림 사이에 있는 것이 좋다. 가는 곳의 크기가 크든 작든 상관없다. 조각상을 맞닥뜨리면 그 눈을 빤히 쳐다본다. 읽지도 못하는 한자의 획을 가만히 바라보며 까마득한 세월을 체감하려 애쓰기도 한다. 경비원으로서 그가 누렸던 예술적 체험은 나 역시 경험해 본 일이었다.


한 번 공통분모를 찾으니, 그의 이야기가 달리 읽혔다. 그가 전한 자신의 시간과 그 사이사이의 모습을 새롭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경비원으로서 일하는 건 공간과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작가는 미술관을 거닐며 작품을 관찰한다. 작품의 배경을 줄줄 읊고, 아름다움을 담백하게 적어낸다. 책의 중반까지 미술관을 벗어난 그의 일상은 작품 얘기 사이에 삽입된다. 그 일상은 매력적이지 않다.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행복한 기억이라 하지만, 그 아래에 짙은 슬픔이 깔려 있다. 그래서일까, 지식과 가치를 쏟아내는 듯한 서술은 경비원이 된 지금을 아름답게 받아들이기 위해 죽을 듯이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배 아파했던 우아한 과거 역시 그 분투의 일환이다.


불쌍해 보이는 고생은 사실 극복과 사랑으로 향하는 정석이었다. 작가는 “어디로 가지 않아도 되는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울은 밖을 보고 있는 시선을 자기 안으로 아득바득 옮겨버린다. 시선이 돌아가면 남아 있는 과거의 행복만 만지작댈 때도 있고, 이미 지난 불행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을 때도 있다. 여기서 예술이 시선을 다시 밖으로 옮겨준다. 우리가 감각 기관을 통해 세상과 다시 맞닿을 수 있게 만든다. 책 속의 경비원이라는 직업은 관찰의 시작이었으며 관찰은 모든 것의 시작이다.


처음에는 예쁘고 화려한 것만 보더라도 상관없다. 삶을 그려내고, 삶의 아름다움을 깨우치게 하는 것이 예술이다. 그다음부터는 연역법의 논리로 세상 속 아름다움을 탐구할 수 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계단에 걸터앉아 밥을 먹던 작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기 모습이 보기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림에서만 보던 멋진 색감도 없을 테고, 길가에는 자그마한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각종 작품을 보며 삶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작가는 지저분한 세상의 매력마저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만히 바라보며 삶을 다시 굴려 갈 동력을 얻는다.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시작한 이가 가장 단순한 일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다시 일상에 가까워진다. 작품 묘사를 이겨내고 등장한 작가의 새 가족 이야기가 그 증거다. 곳곳에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현실, 삶을 뭣 하러 미워하겠는가. 그냥 사랑하면 된다.


그의 성장기를 보며 생각했다. 삶에 대한 사랑을 느끼려면 일상에서 멀어질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이에 거리를 둘 수 있을 만한 공간, 그 거리를 이동할 시간과 자원이 필요하다. 책은 일상에서 멀어질 방법 하나를 제시한 셈이다. 미술관은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주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들만 잔뜩 모아놓았기 때문이다. 현실이 고됐던 작가는 비현실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 비현실은 현실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주었다. 때로는 현실을 미화하면서, 때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보다 처참히 그려내면서 말이다.


내가 박물관에 자주 가는 것도 어쩌면 삶을 다시 사랑할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눈이 마구 내리던 2월의 어느 날에, 날씨도 안 보고 밖에 나온 걸 후회하며 걸었다. 목적지는 하도 많이 가서 지도를 볼 필요도 없던 박물관이었다. 추웠다. 지친 몸을 잡아끌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배웠던 걸 보며 반가워하고, 지루해 보이는 것에 일부러 시선을 던졌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배고팠고, 피곤했다. 예민해지기 딱 좋은 조건을 한가득 품고 왔던 길을 돌아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 바닥에 쌓인 눈, 눈을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빨갛게 부르튼 손, 둔해지는 발가락, 눈을 밟는 소리, 눈을 치우는 소리, 모든 게 실감 나서 좋았다. 그런 기억이 있다.



by.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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