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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형태소 Apr 14. 2024

사랑의 뿌리

사랑에 대하여 4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슬프게도 언젠가 친구 중 한 명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스스로의 고장 난 부분들은 고칠 수 있을 것 같다는 불완전한 희망을 늘 가지고 있다.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충만한 편안 아니다만 변화는 그 계기만 있다면 순식간에도 일어날 수 있는 법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 사랑이라는 달지도 쓴 지도 모르겠는 껌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작업을 계속하다 보니 얻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수브다니의 여름 휴가』를 읽었을 때에는 사랑을 긍정했다.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었을 때에는 세계를 향한 시인의 거대한 사랑을 발견했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었을 때에는 사랑에 대한 나의 두려움도 솔직하게 재확인했다. 사랑을 쓰는 것은 아무리 해도 모자란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세상의 일들을 대개 그렇게 대해야 하듯이,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을 규명하려는 진리를 향한 발걸음은 그 꼭대기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풀어내는 사랑을 향한 찬사는, 적어도 우리를 진리에 수렴하도록 도울 것이라고 믿어 본다.


사랑의 흔적들은 일상과 비일상을 막론하고 어디에든 흩어져 있다. 친구들과 함께 사랑을 곱씹어보는 작업은 그 흩어진 가치들을 다시 긁어모으는 것과도 같았다. 길다고 하면 긴 시간 동안 함께 나누었던 사랑 이야기가 일단은 마무리된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지만 그래도 생각을 나눌 좋은 동료들을 얻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책들 중에서『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를 읽기로  선택하면서 받은 과제는 ‘사랑의 확장’, ‘보편적 사랑’, ‘인류애’ 등에 대한 생각을 담아보는 것이었다.


이놈의 세계는 매일매일 자살하는 것 같다

아무리 말려도 말을 듣지 않는 것 같다

나이 먹었는데 절망해도 되나

죽을 때까지 절망해도 되나

– 진은영, 『빨간 네잎클로버 들판』중에서


사랑의 확장이라거나 인류애라고 하니 불현듯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에서 읽은 진은영 시인의 표현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나 주변 사람들이나 시쳇말로 ‘인류애를 잃었다’는 말을 우스갯소리처럼 쓸 때가 있다. 때로는 농담이 진담보다 잔인할 때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왜 ‘인류애’를 잃을까. 세계가 내게 부여한 결핍과 마주할 때, 뉴스에서 갖은 범죄가 터져 나오듯 보도될 때, 전쟁과 이상 기후가 끝나지 않을 때, 어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드러나는 모습을 목격할 때, … 나열할 수도 없이 많은 순간들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절망’을 느끼고 사랑과 같은 낭만적이고 비이성에 가까운 정념 앞에 차갑게 식은, 세계에게 소진당한 인간이 되며, 특히 나는 한도 끝도 없이 쌓이는 ‘짜증’으로 인해 꼭 한 번씩은 이 모든 세계를 밀어내고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그러니까 내가 ‘기능’하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는 했다. 그래, 마치 브링리 씨가 그랬듯이…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패트릭 브링리의 수필집으로, 그가 미국 뉴욕시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10년가량의 시간 동안 근무했던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긴 책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작중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이곳을 ‘메트’라고 줄여 부르고는 하니 나도 그리 하도록 하겠다.)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거나 큰 미술관이 꼽힐 때 빠지지 않을 정도로 큰,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한 곳이다.


저자는 살아오며 자신의 우상과도 같았던 친형 ‘톰’을 간호하는 긴 시간과 끝내 그의 죽음까지 겪으며 그전까지는 야망과 화려함으로 가득했던 뉴욕이라는 공간을 형의 병상과 초라한 아파트라는 인상만이 다가오는 공간으로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저자는 형을 잃음으로 인해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고, 꾸역꾸역 긁고, 밀치고, 매달려야 하는 종류의 일은 할 수가 없어’진다. 따라서 저자는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를 위해, 그는 이전에는 ‘뉴요커’라는 큰 언론사에서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었음에도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메트의 경비원이 된 것이다.


많은 경우 위대한 예술품은 뻔한 사실을 우리에게 되새기게 하려는 듯하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말하는 게 전부다. 나도 지금 이 순간에는 고통이 주는 실제적 두려움을 다디의 위대한 작품만큼이나 뚜렷하게 이해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이내 그 사실을 잊고 만다. 점점 그 명확함을 잃어가는 것이다. 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보듯 우리는 그 현실을 다시 직면해야 한다.

–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중에서


이 책에서 내가 읽어낸 두 코드는 잔인한 삶 앞에서 소진된 한 인간이 그것을 스스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과정과, 그 도구로서 활용되는 예술의 효과라는 것이었다. 저자는 자라온 환경에 의해 유년기부터 예술을 자주 접해왔으며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그에게 ‘돌아올 곳’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몇 가지 리뷰를 읽었더니 저자가 책의 시작부터 긴 호흡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의 삶, 태도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고백하는 흐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반응들도 있는 것 같았다. 무작정 예술을 찬양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우리 각자에게는 먹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주는 음식이라거나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편안함을 주고 공간, 삶을 살아갈 힘을 다시금 부여해 주는  ‘돌아갈 곳’이 분명 존재한다. 큰 상실과 피로 앞에서 저자에게는 예술과 아름다움이 ‘돌아갈 곳’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드넓은 메트에 깔린 그 수많은 작품들과 미술사를 줄줄 읊고 작품들, 작가들, 심지어 그곳에 오는 관람객들과 직원들로부터도 위로를 얻는 저자의 긴 치유의 여정을 난 모두 이해했고 그래서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이 이 에세이를 위대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널 울게 만드는 것들은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런데 너를 울게 만드는 것들이 죽으면

너는 더 울거지?

– 김우석, 『너를 울게 만드는 것들』


저 많은 협곡을 돌아

저 많은 태풍을 뚫고 집에 돌아와

겨우 잠이 든 시인이

이 세계가 멸망의 긴 길을 나설 때

마지막 연설을 인류에게 했으면 했어

인류!

사랑해

울지 마! 하고

– 허수경,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중에서


언젠가 스치며 읽은 시구들에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우리는 사랑하는 것들이 있기에 그것에 슬퍼할 수밖에 없고, 달리 말하면 우리가 슬퍼하는 까닭은 우리가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무언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건 곧 무엇이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길로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랑은 곧 사랑의 확장이다. ‘인류애를 잃을’ 수 있는 것 애초에 우리가 그 인류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은 항상 우리에게 기쁨만을 주지는 않는다. 어쩔 때 사랑은 야속하게도, 브링리 씨가 우상이자 평생 기대온 존재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가장 거대한 상실과 슬픔을 주고야 말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정말 웃기다고 말할 수도 있는 점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우리를 위로하는 것이 또 사랑이라는 지겹고도 아름다운 굴레이다. 슬픔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돌아갈 곳’을 찾는다.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은 삶이 그들을 좌절시킬 때에 예술을 창조한다. 인류에게 좌절한 시인은 시를 써서 인류를 위로하며 스스로를 치유한다. 당신이 가장 큰 슬픔을 맞았을 때 돌아갔던 곳을 생각해 보면, 그곳에는 아마 당신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부터, 당신의 사랑의 확장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by.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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