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죽지 않고 '어떻게 위험한 밀림을 통과할 것인가?'이다.
이 질문에 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독립적인 전문가들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다른 전문가들과 신중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나는 그들의 이론을 이해하고, 그들은 나의 이론을 철저하게 검증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 모두는 옳게 판단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옳은 답이 나한테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단지 정확한 답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듣기 위해서는 내가 극단적으로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 책 <원칙> 중에서
극단적인 개방. 어떻게 하면 극단적으로 개방될 수 있을까?
어제는 수능일이었다. 수능은 국어-수학-영어-한국사-탐구 과목(사회/과학/직업)-외국어 과목 순서로 응시하는 시험이다. 수능에서 왜 이렇게 많은 과목을 보는가? 그건 수능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이기 때문이다.
학사 과정은 내 생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이다. 입학하면 내 전공만 배우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내 주장을 공고히 해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온갖 이론과 데이터가 얽혀있다.
예를 들어, 영어교육과를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면 제2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아이가 영어를 잘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문제집, 학교 수업 등을 떠올렸는가? 아이에게 발음을 어떻게 가르치는 게 좋을까? 그러면 발성이 일어나는 과정을 알아야 하고, 여기서 생물학적 구조를 배워야 한다. "너 사과 안 먹을 거지?" 라는 질문에 "응, 나 안 먹어." 라고 말하는 게 익숙한 아이에게 "아니, 나 안 먹어." 라는 표현이 영어에서는 더 적절하다는 점을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나라와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뭐 하나 아는 게 너무 어렵다. 학사를 거쳐 일을 하고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배운 점이다. 나는 문과 계열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부 때 영어교육과에서 수학했다. 지금은 보건대학원에서 의학, 사회, 경제, 정책, 생명, 심지어 수학 공부까지 하고 있다. 논문 한 줄 한 줄 읽는 것도 쉽지 않은 날이면 생각한다. '그나마 고등학교 때 이것저것 배운 게 다행이다. 그조차 몰랐다면 이걸 지금 다 새롭게 배워야 한다는 거잖아?'
수능에서 왜 이렇게 많은 과목을 다루지? 나는 인문대 갈 건데 왜 과학까지 해야 하지? (그것도 고3에 물리를!) 불과 10년 전에 가졌던 억울함이었다. 이젠 안다. 나중에 어떤 선택을 하든 이전에 배우고 경험한 흔적은 오롯이 내 것임을. 그리고 그 흔적의 폭이 넓을수록 내 선택의 옵션도 많아짐을.
홀로 의사결정하기 어려운, 특히 내가 그동안 흔적이 적은 시기에 여러 분야를 경험하게 하는 건 마치 예방주사 같은 것이다. 당장은 주사 맞은 부분이 얼얼하고, 심지어는 몸살을 앓기까지 한다. 그렇게 하루 이틀 아프고 나면 내 몸은 먼 훗날 나를 망가뜨릴 수 있는 병을 이겨내는 힘을 갖는다.
수능도 주사처럼 대비책이었으면 한다. 내가 어떤 흥미를 가졌든, 나중에 관심사가 어디로 바뀌든, 변화무쌍한 시대에 언제 어디서 웬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술이 툭 뒤어 나오든, 내 일과 커리어가 무너지지 않도록 말이다. 국어, 수학, 영어, 탐구 과목, 외국어, 한국사를 다 잘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알면 분명 나중에 써먹을 수 있다. 내가 언제 어디에 서있든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