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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가을 폭설의 명암

정전 그리고 웃음

by 보라
스티브 잡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죽음은 삶의 가장 큰 발명품이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깨달으면,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 수 없어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순간이 너무 많다는 걸 알게 되니까. 시간은 너무 빨리 지나가고, 그 어떤 순간도 영원하지 않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인생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 우리의 짧은 삶을 즐기는 방법이라고요.

일상을 여행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여행을 가면, '여행 필터'를 끼고 세상을 보게 되죠. 모든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 하고, 길거리의 풍경도 꺼내 찍고, 부실한 간판의 식당에도 들어가고요. 하루에 10분, 혹은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그런 순간을 경험하면 삶이 훨씬 풍성해집니다.

- 롱블랙 [카피라이터 유병욱 : 매일 똑같은 하루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중에서


이 글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몰랐어요. 아주 보통의 하루의 안온함을요. 어제까지 연이어 폭설이 내렸죠. 버스와 지하철에 사람들은 어떻게든 집에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서로를 밀어요. 눈으로 한 발 내딛기조차 어려운 길에는 사람들이 미끄러집니다. 집에 겨우 이끌고 온 몸은 녹초가 돼요.


수요일 그리고 목요일, 각각 교육장과 집에서 온 불이 꺼져요. 10분 정도만에 불이 다시 켜진 느즈막한 저녁의 정전과 달리, 집에서의 정전은 꽤나 오래 가요. 한 1~2시간을 아침이 됐어도 세상은 깜깜해요. 불이 들어오지 않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물을 따라 마시려 해도 정수기는 전기가 필요해요. 안전하려고 바꾼 인덕션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으니 무용지물이고요.


험난한 모험을 떠납니다. 생수와 부탄가스를 사러 집 앞 편의점에 가는 거예요. 눈 위를 걷는다기보다 눈 속을 걷는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저희 뒤를 바로 연이어 잠옷 차림에 손님이 편의점에 들어와요. "여기 부탄가스 있어요?" 하면서요.


정오가 다 되어갈 때쯤 전기가 다시 들어왔고 해가 뜨기 시작했어요. 따스해진 날씨에 나무에 무겁게 쌓인 눈이 퍽퍽 떨어져요. 눈이 무겁게 누르는 힘을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쩌적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리 꽂혀요.


나무 꺾이는 소리 사이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요. 태어나 처음 보는 눈이 너무 잘 뭉쳐지니 얼마나 신나요. 눈사람, 눈오리, 눈싸움, 눈으로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아요. 그 소리에 하루종일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봤어요. 옷을 챙겨입고 나가요.


세상이 반나절 만에 이렇게 바뀔 수 있나요. 알록달록한 낙엽이 뽀얀 흰눈의 반사광을 맞아요. 하얀 아이들 뺨 위에도 낙엽만큼이나 붉게 홍조가 물들었어요. 이 장면을 보자마자 떠올랐어요. "인생의 해상도가 높아진다면 이런 느낌이구나."


연이은 폭설로 어둡고 지난한 시간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런 시간도 다 흘러가요. 예상하지 못한 기쁨도 어쩌면 같이 올 지도 모르고요. 이번 주말을 맞이하는 마음은 그래요. 매일 똑같던 주말이 아니었구나. 이번 주말은 어떤 재밌는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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