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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에세이

버티기보다는 벼리기를 선택할 수 있을 때

3년의 커리어, 2번의 퇴사

by 보라

3년의 커리어. 그 사이에 벌써 2번의 퇴사를 앞두고 있다.


12월 어느 날, 팀장님과 면담 때 처음 말을 꺼냈다. “** 님, 저 대학원으로 들어가야할지 고민이에요.” 품 속에 사직서는 품지 않은 채 오래 고민해온 말을 겨우 꺼냈다. 그맘때 사수가 팀을 바꾸면서 우리 팀의 신규 구성원을 채용하고 있었다. 만약 내가 퇴사하면 팀장님과 신규 구성원 한 명이 남는다. 작년에 비해 일은 더 많고 어려워졌는데, 숙련된 팀원 둘이 없어지는 셈이다. 이 말을 들은 팀장님의 마음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오래 품기만 해온 말을, 더 이상 미루면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전에, 꺼냈다.


“일단 휴가 다녀오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 그렇게 면담을 마무리했다. 그 다음날 아침, 팀장님은 출근하자마자 “그 말로 내가 잠을 못 잤어!” 하셨다. 멋쩍게 웃으며 “아직 결정된 것도 아닌데요 뭐!” 라고 둘러댔다. 그 뒤로 휴가 가기 전까지 팀장님과 꽤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2024년 일과 공부를 같이 하며 내가 느낀 감정들. 내 100%를 각각 50%로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못한 것 같은데, 50%조차도 못 해낸다는 실망감이 반복되는 날들. 어설픈 바쁜 일상을 너른 아량으로 품어주는 가족과 친구, 동료들에게 쌓이는 미안함. 더 잘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오히려 더 커진 책임감과 부담감. 말하다보니 더 분명해졌다. 아, 나 어쩌면 너무 과한 목표를 잡았는지도 몰라.


감사하게도 팀장님도 솔직한 속 이야기를 털어주셨다. 그 덕분에 마치 농담처럼 퇴사 이야기를 했지만, 마음 한 켠은 여전히 무거웠다. 팀장님이 꺼낸 이야기는 내 이야기보다 훨씬 무거웠다. 내 몸, 컨디션, 관계, 이렇게 나 하나만 감당하면 될 문제였다. 반면에 팀장님은 팀원, 회사, 그리고 가족들을 책임진다. 새로운 도전을 바라보지만 첫 걸음을 떼기 어려웠다. 나의 퇴사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능성을 열어줄 거라 응원해주는 분들이 많았다. 한편, 그는 가능성보다 더 긴급한 일이 있었다.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는 마음, 리더로서 팀과 회사를 아끼는 마음. 2024년 외근 후 돌아오는 길에 회사에서 짤리는 악몽을 꿨다고 웃으며 말씀하신 날이 오버랩된다.


“대기업, 스타트업, 그리고 석사까지 마치고 나면 뭐가 되고 싶어요?” 내 퇴사 소식을 들은 선배들이 하나같이 물으셨다. 내 답은 일관됐다. “저도 그걸 찾으러 나가는 거예요.” 일주일에 5일을 회사 다니고 3일은 대학원에 간다. 특히 2-3일은 22시 넘게 야근한다. 주말에는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한다. 이렇게 가지치기 하지 않은 채 이 시간을 버티면 나는 뭐가 될까? 지금 상황을 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까? 버린다고 해서 다 사라지는 게 아니다. 내 손에 쥐고 있지 않아도 손에 쥐는 법이 내 피부 깊숙이 남는다. 그 감각은 다른 경험을 쥐어낼 때 도움이 될까.


3-5년차 동료들은 다들 퇴사와 이직에 용감하다. 내 일이 40대까지 할 수 없어서, 내 자율성을 좇아서, 내 우선순위는 커리어에 있지 않아서, 이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서, 지금 내 일은 미래에 유망하지 않아서, 지금을 버티지 않는다. 진심으로 커리어를 걱정하며 3년도 채우지 못한 이직은 그간 고생한 시간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한다. 그 애정에 생각했다. 버리기가 아니라 벼리기라고. 벼리다는 무딘 연장의 날을 불에 달궈 두드려 날카롭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마음이나 의지를 가다듬고 단련하여 강하게 하다는 뜻도 있다. 날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불에 달구면 형체가 쉽게 변한다. 그 칼을 쓰기만 하면 무뎌지다 결국 상해버릴텐데, 벼리면 또 잘 쓸 수 있다. 그래, 우리는 커리어를 벼린다. 가다듬고 단련해서 강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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