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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쏠림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사말을 바꾼 계기

by 보라

"이제 슬슬 논문 생각해야죠?"라고 들은 지 석 달이 지났다.


그 사이에 별의 별 일이 다 있었다. 우선 다들 엄두를 못 내던 일부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작년까지 대학 전공별 지원자 수, 입학자 수, 졸업자 수 데이터를 남/녀를 나누어 전자화했다. 이게 별 일인가 싶겠지만, 약 2000년 이전에는 데이터 원본이 PDF다. 심지어 엑셀을 PDF로 뜬 버전보다, 타자기 혹은 손으로 쓴 것 같은 버전이 많다. 잉크가 약간 번져서 AI는 절대 읽지 못하는 파일이다. 그 파일에서 숫자 하나하나를 엑셀에 쳤다. "인생의 모든 '삽질'은 가치가 있다"는 말을 머릿속에서 되뇌이면서 했다.


또 한 번은 연구 식 자체를 바꾸었다. 연구 식은 내가 설정한 논리 구조와 변수를 모두 담고 있다. 즉, "연구 식를 바꾼다"는 말은 연구의 처음부터 갈아엎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연구 식만 봐도 연구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눈에 알 수 있어야 해요."라는 교수님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연구 배경과 목적을 가지고 있어도 그 서사가 연구 논리와 변수에 반영되지 않으면 연구는 산으로 간다.


고백하자면 내 첫 연구 식은 '포부가 넘치지만, 내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왔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인재가 하나의 목표로 달리는 세태가 정상적인가, 이 일은 우리나라를 어떤 미래로 이끌 것인가, 다른 나라도 같은 방식으로 가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붙잡고 있었다. 여러 문헌과 데이터에 허덕이던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아직도 모르는 게 많다'는 마음에서 멀어졌다. 한편, 연구 현황을 교수님과 선배들에게 설명할 때 영 속 시원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기 위해서는 '지금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를 먼저 알아야 했다. 이 물음에 답을 찾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논리 구조와 변수가 이해됐다. 그제서야 내 앎과 모름이 또렷해졌다.


IMG_EAE96581681D-1.jpeg 석사로서 너무 공감했던 짤


이 와중에 KBS 다큐멘터리 "인재전쟁"이 나왔다. 내 연구를 알고 있는 선배들과 친구들이 이 다큐멘터리 소식이 나올 때마다 부리나케 그 소식을 전해줬다. '왜 이 일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하고 있던 시점에 이 프로그램은 문헌과 데이터로 보기 어려운 면을 잘 보여줬다. 의대 쏠림, 공대 기피 현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로 생생하게 전달되는 서사는 정보 조각의 사이를 메웠다. 덕분에 내 머릿속 생각들이 현실에 잘 붙을 수 있었다.


9월에 논문 계획 발표를 앞두고 있다. 본 과정에 앞서 연구실에서 연구 현황 공유회를 하고, 논문 계획서 발표를 위한 서류를 작성하고 있다. 그럴 때 내 연구의 배경, 목적, 방법과 기대효과를 일목요연하게 글로 다듬는다. 이때 묘한 감정이 피어난다. 스스로 질문하고, 배우고, 답하려고 애쓰던 장면이 떠오른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구학도입니다."가 아닌, 다른 첫 인사말이 만들어진다. "안녕하세요, 저는 인재를 연구하는 인구학도입니다. 이번 연구 주제는 의약계열 쏠림 현상의 인구학적 원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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