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위플래쉬> 리뷰
위플래쉬에 대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이 영화는 음악 영화를 가장한 액션 스릴러 영화다.”
삼 년 전쯤 아이패드로 처음 보고, 이번에 십주년 기념 개봉을 아여 마침 또 집 근처에서 상영해주길래 극장에서 다시 봤다.
그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많이 보인다. 먼저 이렇게 스타일리시한 형식으로 무장한 영화인줄 몰랐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으로 찍혀 곳곳에 인서트된 매우 짧은 쇼트들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를테면 교수가 칼같이 강의실로 들어올 때의 '문'이나 '시계', 또 네이먼의 '드럼' 같은 것들을 따로 찍은 후 리듬에 맞게 착착착 편집되어있다. 마치 '뜨거운 녀석들' 같은 에드가 라이트 감독 영화 같다. 이 유려한 편집과 배우의 연기가 극의 리듬과 관객의 몰입을 온전히 장악한다.
배우들의 연기는 완벽에 가깝다. J. K. 시몬스는 목의 주름까지, 마일스 텔러는 체형과 자세까지 연기한다.
J. K. 시몬스가 연기한 플레처라는 사람은 살면서 만나고 싶지 않은 영화 속 인물 top5에 들 정도로 악마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네이먼도 호감은 아니다. 가족과의 식사 자리에서 하는 이야기, 꿈을 위해 이별 통보를 하고 (거기까진 오케이) 믿었던 꿈에게 배신 당하자 자신이 버린 여자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장면, 또는 동료가 실수할 때 은근한 미소 짓는 그 표정을 보면 (이 비열해 보이는 미소를 클로즈업까지 해서 보여준다) 그에게 호감을 가질 수가 없다. 근데 인물이 비호감이라고 영화가 안 좋은 건 아니니까!
“모든 것은 두 번 반복된다. 그럼 두 번째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동진씨의 '아사코' 한줄평이다. 재즈클럽에서 재회한 네이먼과 플레처를 보고 '아사코의 선택'이 생각났다. 아사코는 처음과 정반대의 선택을 하지만, 네이먼은 아니다. 플레처에게 그렇게 학대를 당한 네이먼은 그의 덫에 다시 걸려든다. 아니, 걸려들었다기보다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수동이 아닌 능동이다. 그 지옥을 맛보고도 제 발로 불구덩이 속으로 또 들어간다. 예술가의 순수한 열정인가, 성공을 향한 욕망인가. 깊은 성찰이 이루어진 아사코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참 슬프고 비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두번째 선택 이후, 엔딩 시퀀스에서 신들린 연주를 보여주는 (플레처 못지않은) 광기의 화신 네이먼은 플레처와의 불꽃이 그 순간만큼은 화려한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인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이 장면이 너무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견해에 일부 동의하고,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영혼의 합이 맞았다는 견해 역시 동의한다.
다만 전자의 경우, 어쨌든 손익분기점을 넘겨야 하는 상업영화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생각하고, 그게 아니라 후자라면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 통했다고 하여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네이먼은 다시 플레처의 꼭두각시가 되어 자기 자신을 갉아먹다 파국에 이를 것이라고 본다.
실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엔딩 이후 네이먼은 어떻게 되었을 것 같냐는 질문에, 마약에 찌들어 속이 텅 빈 채 살다가 30대쯤 아마 약물 중독으로 죽었을 거라고.
부족한 재능을 피나는 노력으로 채울 수 있을까. 네이먼에게 찰리 파커 같은 재능만 있었다면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의 가족 중 음악가가 없다는 사실에 플레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애매한 재능은 축복보다 오히려 형벌에 가까운 것 같다. 재능이 전혀 없으면 그쪽은 아예 쳐다도 안 볼 텐데, 어느 정도 재능이 있으니 희망을 갖고 될 때까지 자기 자신을 혹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모든 피나는 노력을 한 사람이 다 성공하는 건 아니지만, 모든 성공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피나는 노력을 했을테니. (로또 1등과 같은 특수한 케이스를 제외하면..)
그렇다고 해서 노력만능주의 또한 옳지 않다. 나는 '인생은 결국 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말은 운이 노력보다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이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노력 그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행운의 여신도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올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면, 그럼 네이먼은 오로지 그가 잘나서, 피를 흘리며 -비유가 아니라 실제 연습하며 붉은 피를 수없이 흘리고 그 이미지가 굉장히 짙다- 열심히 노력해서, 오로지 노력만으로 일류 재즈 밴드의 드러머 자리를 꿰찬 것일까? 운의 요소는 없을까?
당연히 아니다. 극중 플레처의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 영화의 오프닝에 네이먼이 연습실에서 혼자 연습할 때 플레처가 미리 귀띔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가 사수 드러머의 악보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마지막으로 플레처는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 시스템으로, 네이먼은 그에 귀속된 현대인의 거대한 심볼처럼 보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가 플레처라는 시스템에 잠식되는 네이먼인 것이다. 재즈클럽에서 재회한 네이먼에게 플레처가 하는 설교 속 철학의 논리가 경쟁사회의 구조와 매우 닮아있다.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위플래쉬를 보고 "나태해진 내 삶에 새로운 자극제가 된다.", "성공할 수 있다면 과정은 어떻든 상관없어" 와 같은 평이 많다고 하던데. 이것과 과도한 경쟁 시스템과 사회적 기대, 들끓는 교육열의 압박 속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자살률 1위라는 사실은 과연 우연일까?
"미쳐야 산다, 미쳐야 성공한다."
영화의 주제를 이렇게 받아들이는 관객이 많은 것 같다. 왓챠피디아 베스트 댓글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정반대의 의견이다.
미치면 죽고, 미치면 실패한다(그럴 확률이 높다).
찰리 파커는 세상에 하나뿐이고, 세상 모든 사람이 찰리 파커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