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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hill Jun 03. 2024

눈 한가운데의 그녀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간다.      



시간은 정오를 한참 지난 오후가 되었으며, 태양이 어눅어눅 지기 시작할 때가 되야 그녀에게 도달할 것이다. 내가 걷고 있는 산을 이루는 언덕과 숲과 들판은 아직 밝은 햇살의 기운을 받아 생생하고 푸르게 빛을 내뿜고 있다.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햇빛은 그다지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가면서, 마음을 차분하고 다정하게 하기 위해서 그녀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려 본다. 머릿속에 펼쳐진 의식이라는 흐르는 강물, 그리고 그 위에 놓인 기억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났던 순간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 본다. 내가 걷는 방향과는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 처음으로 되돌아가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얼어 있고, 차가운 바람이 거칠게 휘몰아치던 시절, 겨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시절, 나는 그녀를 만났다. 나이는 나와 비슷하게 젊었지만, 나는 처음 만나던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포함한 또래의 다른 사람들과는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돌보고 지키는 일을 맡게 되었는데, 나에게 그녀를 맡긴 상관들은 그녀의 중요함 그리고 특별함을 계속해서 거듭 강조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 어떤 이유에서 그녀가 특별한지는 결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마치 수수께끼의 베일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며, 그녀가 가는 곳마다 신비로움이 따라가는 듯했다.     


 

태양이 떠 있는 오전 동안에는 그나마 추위가 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바깥으로 나가 눈을 치우거나 건물, 시설을 세우고 고치는 등 고된 일을 하였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그녀는 힘든 일을 하는 무리에서는 항상 예외였으며, 그런 그녀를 돌보는 일을 하는 나 역시 거의 항상 실내에만 머물러야 했다. 그녀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으며, 책을 읽거나 뜨개질을 하는 등 조용하고 차분한 활동을 많이 했다. 하지만 한 구석이나 방에 틀어박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며, 기다란 복도나 거대한 거실, 강당 따위를 걸어다니곤 했다. 아주 가끔씩 창문을 열고서 바깥의 차가운 얼음 바람을 얼굴에 맞기도 하였으나,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재빨리 창문을 다시 닫고 못된 짓이라도 한 듯 자리를 뜨기 일수였다. 그녀는 먹는 것에 있어서 특히 까다로웠는데, 항상 신선한 채소와 과일들을 먹여야 한다는 지시를 받은 나는 힘들게 귀한 야채들을 골라서 그녀에게 먹였다. 그녀는 음식을 가리는 일 없이 영양분을 섭취했다. 나는 그런 그녀의 곁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말없이 앉아 있으면서 보냈다. 가끔씩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지만, 내가 그녀의 개인적인 부분이나, 가장 궁금했던 그녀가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 물을 때마다 나는 그녀에게서 불편한 기색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겉으로는 티내지 않았지만 분명 숨기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녀와 관련되어 가장 특별했던 점은 다른 사람들과 같은 물을 쓰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항상 바깥에서 눈을 녹이거나 흐르는 강물 등에서 구해온 자연의 물만을 마시고 몸을 씻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비슷한 일상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어딘가 불편하고 힘든 얼굴을 하며 나에게 나타났다. 그녀는 이제 때가 되었다며, 이곳을 떠나 자신의 소명을 다할 때가 되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한 나는 문 앞에서 그녀를 막아세웠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고, 계속해서 나를 밀치고 저항하려 했다. 이제까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던 그녀가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자, 나는 내면에서 불안함과 화, 답답함 등의 감정들이 뒤섞여 내 마음을 집어삼키는 것을 느꼈다. 내 팔을 붙잡던 그녀는 그것을 느낀 듯, 갑자기 힘을 풀더니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을 바라본 나는 역시 뒤로 물러났으며, 우리 둘은 잠시 동안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나의 볼에 손을 얹은 채로 내 얼굴을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동안 말하지 않아서 미안해요, 하지만 나는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요.”그녀의 눈끝에서 맑고 투명한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나의 얼굴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으며, 나는 허리를 숙이고 그녀의 움직임에 따랐다. 그녀는 자신의 입을 내 귓가로 가져간 다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안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어요. 이 겨울을 끝낼 수 있는 나무가.”

말과 함께 그녀는 자신의 겉옷을 들추어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피부는 나무의 껍질과 같이 단단하게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으며, 잎사귀와 식물의 줄기 같은 것들이 몸을 조금씩 뒤덮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말을 잃은 나에게 그녀는 다시 속삭였다.

“이제 이 나무를 자연에, 땅에 심고 피워낼 때가 왔어요. 그동안 지켜줘서 고마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를 뒤로 한 채, 그녀는 문을 열고 하얀색의 세상으로 걸어 나갔다. 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고 발끝과 피부를 송곳처럼 찔렀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했다. 문을 열고 찬바람을 맞으면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저 멀리, 그림과도 같은 하얀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 수 년이 흘러, 나는 다시 그녀를 만나기 위한 여정에 올랐다. 눈이 녹고 추위가 사라진 이 들판에는 따스한 햇빛 뿐 아니라 넓게 퍼진 숲과 들판의 정기가 아름답게 흐르고 있었다. 그녀와의 추억을 회상하다 보니 어느새 그녀의 앞에 나는 다다르게 되었다.      



내 눈앞, 숲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에는 푸르고 생기가 도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 있었다. 들판의 식물들은 마치 이 나무 한 그루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나는 이 들판의 풍경, 그리고 나무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보며 마음속에 새겼다.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고 따뜻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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