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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형 Sep 16. 2022

0. 회고에 앞서

백면서생 이야기

  목욕재계 후 사나흘 밤낮을 골방에 앉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글을 썼다가 지웠다를 반복하지만 모니터 화면상의 진척도는 달랑 네다섯줄의 짧은 글. 시계를 보니 어느덧 새벽 4시 입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자 마음먹고 컴퓨터를 끄려는 순간에 꼭 영감이 찾아옵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키보드를 두드려보았더니 이게 웬일이랍니까? 마치 둑이 터지듯 글이 쏟아져 나옵니다. 하필 이제서야 '영감의 시간'이 강림하였습니다. 휴대폰 배터리 잔량 5퍼센트의 깜빡임 처럼 몸도 마음도 피곤에 찌들어 애처롭게 깜빡이지만 절대 내일로 미뤄서는 안됩니다. 이번에 온 영감의 시간에 탑승하지 못하면 다시 몇날몇일을 모니터만 바라보며 영감이 찾아오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쳐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시간에 최대한 많은 진도를 빼놔야 합니다. 일단 영감의 시간에 승차하고 나면 하차할 때 까지식사도 잠도 모두 미뤄두어야 합니다. 허락되는 여유는 오직 막간에 피우는 담배타임과 티타임 뿐. 체력이 방전이 되면 요가매트를 깔고 쪽잠을 청합니다. 아늑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자게되면 너무 깊이 잠들어 출근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학술지나 학회에 발표할 논문이 완성될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합니다. 드디어 한편의 논문이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약 한달은 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동안 도태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워야 합니다. 안그러면 나 같은 둔재는 대학원에서 금방 도태되고 말테니까요.

  

  만리타향의 대학에서 학업을 시작한지 어느덧 10년이 흘렀습니다. 그간의 소회를 털어놓자면 저에게 있어 학문이란 참으로 고리타분하고 갑갑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모든 의사소통은 서면을 통해 이루어지며 엄격한 형식을 지켜서 해야만했거든요. 예를들어 '이 음식 저 음식 먹어보았더니 밤에 먹는 라면이 가장 맛있더라'라는 간단한 말을 하기 위해서 밤에 라면이 맛있는 과학적 근거와 거기에 걸 맞는 수식을 찾아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 했던 비슷한 연구결과, 예를들어 '햄버거가 맛있는 이유'에서 '소금이 입맛을 사로잡는다'라는 부분을 따로 발췌해서 인용해야 합니다. 이제 글이 완성되었으면 띄어쓰기와 용지 설정과 같이 엄격하게 형식을 맞추어 줍니다. 그러면 논문이란게 완성이 되는데, 단 하나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이렇게 까지 강박적으로 형식을 맞추고 온갖 배경과 타당성과 근거를 장황하게 늘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도무지 갑갑했습니다. 저는 소위 학자의 삶이 나와는 맞지 않다고 단정짓게 되었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말도 많았고 주장하고 싶은 바도 많은데 앞서 해둔 방식으로 의사소통을 작성하자니 하고싶은 말의 100분의 1도 못하겠더군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중간중간 속세와 접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나름의 보람된 일들도 많이 해보았습니다. 학교 밖의 세상은 참으로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 같았습니다. 바깥 세상에 대한 몽상이 더욱 짙어져 갈 무렵,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전염병이 제가 있는 곳에까지 창궐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만나고 집안 경조사에도 참석하는 등 나름 그간의 몽상대로 열심히 살아보았습니다마는 염증을 느끼기에 반년이면 충분했습니다.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 했던가요? 만리타향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소외감을 고향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결코 유쾌하지 못한 슬픈 기억으로 오래도록 남을 것 같군요. 짧은 시간동안 세상에서의 나의 열심은 흉내내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결국 목청 좋은 사람들의 지록위마(指鹿爲馬), 내로남불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세가지가 있다면 위선과 거짓 그리고 탐욕이 아닐런지.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해서 공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졸업시기 때마다 밀려오는 배움에 대한 아쉬움으로 인해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외치다보니 가방끈이 늘어나버렸을 뿐입니다. 그로인해 저는 파락호로 정의 되어지고 말았습니다. 소통으로써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더니 남자답지 못한, 징징대는 파락호가 되어버렸습니다. 능력 없는 사람은 옳은말을 하면 변명이 되고 행여 틀린말을 하면 거짓말이 되는것 같습니다. '할말하않'이라는 신조어처럼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듣기만하는것이 저 같은 인간의 미덕일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세상 살아가는 법은 점점 더 모르겠습니다. 의사소통은 예전처럼 책으로 듣고 글로 말하는것이 좋겠습니다. 고향에서의 짧은 일탈을 마치고 다시 골방으로 돌아갑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애초에 한두평 남짓한 골방이 나의 고향이 아니었을까요?

 

  골방의 문을 열고 한발 들어서기만 하면 저는 다시금 제 책상에 모니터만 처다보며 살게 될 것입니다. 외롭고 갑갑할테지만 바깥 세상보다는 나으리라는 확신 하면서도 왜인지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는군요. 미련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억지로 한발 떼려고 하면 나의 머리속에서 빛 바랜 갈색의 아지랑이들이 피어오릅니다. 그 후에는 곧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펑펑 눈물이라도 쏟아 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실성한 사람처럼 입가에서 희희 웃음만 세어나오니 미쳐버릴 노릇입니다. 짐작컨데 추억이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것 같습니다고향 곳곳에 남겨둔 저의 기억들을 회수해야겠습니다. 본향(本鄕)으로 돌아가기전에 이 감정의 실체를 확인하면 아마도 미련없이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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