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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바 Oct 07. 2022

출국 1시간 전, 이상하게 설레지 않았다.

태풍이 오는 와중에 출국이라니. 첫출발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뉴스 특보입니다. 전국이 태풍 영향권에 있으니 …’


  공항에서 비행기와 가장 밀접한 공간, 출국 라운지 텔레비전에서는 연달아 태풍 소식을 보도 중이었다. 공교롭게도 내가 출국하기 직전, 슈퍼태풍 힌남노가 한반도에 북상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인천은 직접적인 영향권 밖이었다는 거다. 비행기를 제때 탈 수 있겠냐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몇 초간 떠돌던 그 문장은 그새 흐지부지되었다.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상하게 별로 설레지 않았다. 한 시간 뒤면 비행기를 타는 데도, 이상하게 내 마음은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오른쪽 옆에 보이는 비행기를 봐도 같았다. 덤덤했다.


  그래도 공항에 도착하면 뭔가 다를 줄 알았다. 공항, 그중에서도 인천공항은 내 첫사랑이었다. 갈 때마다 마음이 콩닥콩닥 뛰었다. 어린 시절 해외여행을 떠날 때부터 나는 유독 인천공항을 좋아했다. 어딜 가도 환하게 켜져 있는 공항 조명이 특히 최고로 마음에 들었다. 그 아래서는 ‘진짜 내가 여행을 떠나는구나!’라는 설렘이 배가 되었다.


  여행이라는 게 뭐냐, 흔히 경험할 수 없는 경험이니 평소보다 훨씬 신나야 하는 게 정상이라 생각했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미친 듯이 들떠야 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내일 당장 출근해야 할 것 같았다. 너무나도 덤덤했고, 평범했다. 런던에 100번째 가본 사람이라면 이런 기분일까? 고작 세 번째 가는 거면서. 빳빳한 티켓에 적힌 MISS.라는 이름을 봐도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기분을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가방에 넣어두었던 손바닥 크기의 갈색 수첩을 꺼내 들었다. 볼펜을 들고 적기 시작했다.


 ‘9월 4일. 지금 내 기분 : 왠지 약간 불안하다.’


 첫 문장에서부터 감정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어서 계속 적었다. 실은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출국장 의자에 몸을 기대고, 본격적으로 감정을 쓰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온점을 찍고, 이어서 한 문장 더 적었다.


'준비되지 않았다.'


홀연 듯 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실체 없는 부담감이 그제야 정체를 드러냈다. 혼자서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꽉 쥐고 있는 손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괜히 찝찝해져 손을 닦았다.


부담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달라진 게 너무 많았다. 여럿이 아닌 혼자였고, 늘 함께하던 계획표는 없었다.

당장 내일 뭘 해야 할까. 손에 잡히는 계획이 없었다. 더욱 불안했다. 친구들이랑 함께 여행을 가거나, 가족이랑 함께 할 때는 당연히 없던 일이었다. 그전에는, 구글 맵을 수백 번도 더 검색하면서 경로를 그려보곤 했다. 공항에 도착해서 어느 식당에서 무슨 메뉴를 먹어야지. 몇 번 버스를 타고 대략 몇 시에 숙소에 도착할지. 그렇게 정했다. 한번 가본 여행지라고, 너무 자신했다. 통장에 남은 잔액은? 10만 원이 채 안 되었다. 정말 있는 돈, 없는 돈을 다 끌어와서 가는 여행이었다.


일종의 미션.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꼭 무언갈 얻어와야만 했다. 끝내주게 행복하고 기억에 남을만한 여행! 웨이팅 전 마지막 여행! 이런 여행을 다시는 갈 수 없을 거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게 준비되지 않은 마음에 부담을 한 트럭 더했다.


주저리주저리. 무교지만, 하느님이든 부처님이든 내게 정답을 알려줘. 허공에 메아리치듯 종이에 휘갈겨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라는 질문이 나올 때부터 글씨를 쓰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이래저래 흐르던 생각의 흐름이 멈췄다.


사실상 답이 없는 문제였다.


완벽히 준비되었다 느끼는 순간은 없을 거다. 게다가 나처럼 미루고 미루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늘 얼렁뚱땅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수능을 볼 때도, 병원 면접을 볼 때도, 처음으로 옆자리 친구에게 말을 걸 때도. 시작할 때는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했다. 그러다 보면 어찌어찌 답이 나왔다.


여행도 어찌 보면 비슷할 거다. 일단 그냥 시작해야 한다.


첫 시작이 장밋빛으로 설레기만 할 수는 없다. 감정의 색깔을 꼭 하나로 정해야 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찝찝했고, 마음 한구석은 불편했다. 그렇지만, 마음속 한 구석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은 설레는 기분을 느끼며, 수첩을 덮었다.



  공교롭게도 비행기가 연착되었다. 완벽한 건 없다ㅡ라고 세상이 나에게 회답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원래 게이트가 오픈하는 시간은 12시 30분, 게이트 마감이 1시였다. 그렇지만 1시 8분이 되어서도 게이트는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도 제멋대로 바뀌는데, 백 퍼센트 완벽한 준비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1시 30분이 되어서야 게이트가 열렸다. 한 손에는 캐리어를 들고, 한 손에는 여권을 꽉 쥐었다. 아직도 얼떨떨하다. 감사합니다.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는 승무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비행기 안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멍한 마음 40퍼센트, 불안한 마음 30퍼센트, 설레는 마음 30퍼센트. 준비되지 않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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