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콜 Jun 06. 2022

월드 오브 프라이드

프라이드 먼스 특집 (1) - 도대체 프라이드 먼스가 뭔가요?

*** 아이러니하게도 축제가 시작되는 6월, 내가 애정 했던 뉴미디어 채널 닷페이스가 문을 닫았다. 이 글을 빌어서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0. 프라이드 먼스가 뭔가요?


가정의 달이 5월이라면 6월은 퀴어의 달(혹은 프라이드 먼스)이다. 왜냐고? 1969년 6월 뉴욕에서 일어난 성 소수자 해방운동(스톤월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6월이면 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도시에서 퀴어 해방을 꿈꾸는 축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축제를 프라이드라고 부른다. 프라이드는 올해로 53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지난 2년간 축제가 취소되어 그런지 올해 더욱 뜨거운 열기가 예상된다. 머지않아 내가 있는 이곳 유럽 전역이 무지개 빛으로 물들 것이다.



# 1. 퀴어의 달, 자유의 달


그런데 도대체 퀴어의 달이 왜 있고 축제라고 왜 이렇게 난리인 것이냐. 한국에서의 나는 퀴어축제에 찾아간 적도 없고, 퀴어축제가 언제 어디서 열리는지도 몰랐으면서 말이다.


한국에서의, 특히 지방에서의 퀴어 축제는 사실 두 발 벗고 나서 찾아보지 않으면 장소도 시간도 접하기 힘들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서 귀에 들어오는 것도, 도시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축하하는 것도 아니다 보니, 아는 사람들만 알고 가는 사람들만 가는 분위기랄까. 특히 서울과 대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의 퀴어축제는 시작한 지 5년도 되지 않은 새내기 축제이니 만큼 아직 기획 규모도, 인력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최근 들어 SC제일은행, OB맥주와 같이 모기업이 외국에 있는 기업체들이나, 소수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왓챠 같은 스타트업에서는 프라이드를 기념하는 SNS 포스팅을 올리거나, 특선 광고를 기획하고, 프라이드 행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스포티파이, 넷플릭스와 같은 외국계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도 프라이드 특집 큐레이션을 제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국내의 대기업, 주요 언론과 플랫폼들은 침묵한다. 여전히 한국에서는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고 있고, 중요하게 생각될 때도 성소수자는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서구권 대도시의 퀴어 축제에는 퀴어뿐 아니라 시민 모두가 자연스럽게 참여하고, 도시가 나서서 축제를 홍보한다. 그리고 가장 큰 차이점은 대기업과 주요 언론사들이 나서서 이때다 하며 자기 회사가 가진 이퀄리티(Equality) 이념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업가치를 존중받을 수 없고, 더 나아가 기업이 환영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6월 1일이 되자마자 내 링드인(구인구직과 관련된 소셜 네트워크)에는 각종 기업 홍보처, 식당, CEO들이 내건 축하 문구나 이벤트, 사은품 소식으로 도배됐다. 학교 근처의 몇몇 식당 역시 스티커나 뱃지를 증정하거나 포스터를 붙이는 것으로 지지를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살면서 프라이드 먼스가 이렇게 크게 와닿은 적이 없었는데, 남자친구는 5월부터 이미 프라이드 먼스 때 입을 티셔츠를 산다느니 하고 6월 1일이 되자마자 SNS에 무지개 스티커를 붙인 축하 스토리를 올리는 등 오버다 싶을 정도로 한껏 들떠있었다. 오픈리긴 하지만 평소에는 꽤나 보수적인 남자친구가 이렇게 환장하는 것을 이곳에 오기 전의 나는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막상 유럽에 오니까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때만큼은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 축하받는 기분이랄까. 친한 친구들의, 혹은 내 공연을 앞둔 것처럼 괜히 설레고 뿌듯한 마음이 느껴지는 시기. 같은 도시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는 비슷한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로부터 남은 한 해를 살아갈 용기와 응원을 수확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을 나만, 우리 퀴어들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유럽에서의 프라이드는 성소수자뿐 아니라 퀴어의 가족들, 친구들을 포함한 도시의 구성원들이 다 함께 즐기는 축제이기 때문이고, 그만큼 축제에서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퀴어를 좋아하고 지지하는 사람들, 그들의 지인들 혹은 별생각 없는 사람들도 모두 축제에 찾아온다. 축제라는 것의 본질이 일상에 지치고 지루함을 느끼는 도시 사람들에게 설렘과 들뜸을 잔뜩 안겨 준다.


그러니 이들 도시에서는 프라이드 축제의 규모와 함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좋아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춤추고 즐기는 것의 힘이고, 그래서 우리는 축제의 힘을 믿는다.



# 2. 왜 프라이드일까?


프라이드라는 이름은 제1회 게이 퍼레이드 쇼를 기획한 뉴욕의 양성애자 운동가 브렌다 하워드의 별명 Mother of Pride(긍지의 어머니)에서 따왔다고 한다. 영어에서 프라이드(Pride)는 합리적인 자부심, 자긍심에서부터 그러한 정도를 넘어서서 오만하고 자만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상태를 모두 표현하는 단어다. 물론 프라이드 축제에서의 그 뜻은 성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단어에서 오는 어떤 뉘앙스가 사람들의 기분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퀴어 축제라고 하지 않고 프라이드라고 불러서 그런지, 정말로 그 현장에 가보면 사람들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또한 퀴어들을 응원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보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사랑과 따뜻함, 연대와 포용의 의미를 체험하게 만든다.


한편, 어린 시절의 나는 프라이드 행사의 꽃인 퍼레이드 쇼에 항상 요란하게 입은 (혹은 요란하게 벗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사람들과, 드랙킹, 드랙퀸이 나와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나처럼 꽤 노멀*한 (혹은 일반인스러운) 사람도 있는데 이건 괜히 게이들을 싸잡아 편견을 심어주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에 스스로가 걱정되기도 했고, 이렇게 래디컬한 장면을 보고 충격받아서 우리를 더 싫어하면 어쩌나 하며 되려 비-성소수자들을 걱정하기까지 했다.


(*영어권에서는 노멀(Normal)이란 단어를 쓸 때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돈다. 내가 생각하는 노멀의 범주와 상대가 생각하는 노멀의 범주가 다를 수도 있기에 신중히 내뱉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멀이라는 단어는 내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규명하는 동시에 내가 가진 편협함을 드러내는 단어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생각할 법한 진실이 아닌 이상 함부로 갖다 붙이기가 어려운 이 단어를, 옆에 있는 사람의 진심조차 알지 못하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은 과거의 그런 생각이 게으르고, 안일하며, 노멀함에 대한 사람들의 편견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일임을 안다. 일반적이라는 기준을 만들어 편을 가르고, 그것에 빗대어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가. 다수의 기준으로 선을 긋다 보면 결국 게이인 것 자체가 노멀함과는 거리가 멀다. 노멀하지 않은 내가, 노멀하지 않은 퍼레이드 쇼를 못마땅해하는 꼴이라니. 그러니까 우리는 선을 지우기 위해, 노멀리티라는 사회적 환상을 깨기 위해서* 퍼레이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난하는 사람들이 감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실제로 심리학에서는 싫어하는 대상이라도 계속 보다 보면 아무렇지 않아지는 현상을 단순 노출 효과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 3. 나의 프라이드 역사


이참에 내 생애 첫 퀴어 퍼레이드 썰도 풀어볼까 한다. 때는 바야흐로 4년 전, 한국을 처음 벗어나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해서, 생전 처음 퀴어프렌들리한 환경에서 오픈리 퀴어들과 대화를 나누던 무렵의 이야기다. 나는 걸음마를 떼는 아기처럼 처음 만나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진짜로 열 명 중 한 명 꼴로 나타나는 주변 퀴어들도 그렇고, 하나님은 성소수자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교회도, 아이를 키우고 있는 옆집 레즈비언 부부도, 이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환대의 분위기도 놀라웠다.


나만 아주 오랜 시간 제자리에 멈추어있었다는 생각이 들 때쯤, 근처 LA에서 퀴어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려 전 세계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큰 규모라는 이 축제에서 뭐라도 하고 싶었는데,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봉사활동 밖에 없었다. 속전속결로 봉사자 지원을 하고 메일로 안내를 받았다. 축제기간은 금세 다가왔고 나는 축제 때 입을 티셔츠를 고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곳에서 내가 맡은 일은 입장 팔찌를 채워주고 매표소 인원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내 복장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 무난해서 눈에 튈 정도였고, 눈을 어디 둬야 될지 모르겠는 (그렇지만 내심 즐거운) 상황이 이어졌다.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 같아 보이는 이 따분한 아시안에게 관심을 가지기에 축제의 열기는 너무 뜨거웠고 그 사실이 나를 조금 서럽게 했다. 그래도 축제에서 받은 봉사자 티셔츠가 너무 마음에 들어 이틀 간의 축제 내내 그 옷을 입고 거리를 쏘다녔는데, 아마 그때 별에 별 낯부끄러운 광경을 (드레스를 입은 할아버지, 나체의 무리들, 티팬티 등등으로 요약되는 장면들) 다 본 덕분에 그 후로 웬만한 시각적 충격에는 꿈쩍도 하지 않게 된 것 같다.


한편 LA 프라이드가 그 도시의 뜨거운 태양으로 대변된다면, 정확히 1년 후에 방문한 샌프란시스코의 프라이드는 그 도시의 기업들에 의해 좌우되고 있었다.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IT 주역들이 위치한 도시답게, 이곳의 프라이드는 뭐랄까 혁신적이고 실용적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퍼레이드 쇼가 가장 인상 깊었는데, 구글, 애플,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실리콘밸리 거물 기업들의 직원들이 한정판 스티커와 굿즈를 나눠주며 퍼레이드를 진행했는데, 이 테크 기업들을 동경하는 나로서는 그 굿즈 모으는 재미만 해도 쏠쏠했다.


그렇지만 수만 명의 행진자들이 뽐내는 프라이드를 보면서 나 자신이 왠지 조금 초라해 보였던 것 같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작 나에게는 프라이드가 없었다. 머리로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열려있지 못했고 누구에게도 성정체성 앞에 진실하지 못했으며, 나 자신이 딱히 자랑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축제로부터 몇 주 뒤, 내 첫 커밍아웃을 감행했던 기억도 난다. 물론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스스로를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 같고, 그래서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자부심과 함께 자유로이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되어 행복하다.



# 4. 왜 기업은 프라이드를 지지하는가?


나는 샌프란시스코 등지의 프라이드를 보고 들으면서 처음 퀴어프렌들리한 회사에서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고 일한다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같다. 퍼레이드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기업들(H&M, 나이키, 아디다스, 캘로그, 레고, 게티, 로레알, MAC ) 프라이드 먼스를 맞아 캠페인을 열고 수익금을 기부한다. 아니 한국을 벗어나니  회사와 동료가 힘을 합쳐  성정체성을 지지해준다. 도대체 ?


이에 대해서는 복잡하고 다양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러한 이유들의 핵심에는 성소수자 문제가 결코 나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존재한다. 유럽에 살게 된 후 맞이한 변화들 중 하나는 퀴어가 정말 한 다리 건너 한 명 꼴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강의실에서도 게이, 레즈비언, 바이섹슈얼 친구들이 열마다 앉아 있고, 친구네 가족 중에도 꼭 한 명씩 성소수자가 있으며, 시내에 나가면 한 명씩은 퀴어한 복장(크로스 드레싱)이나 헤어스타일을 갖춘 사람을 마주친다.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가정의 말을 넘어서서 성소수자는 실제로 모든 곳에 있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 이를 성소수자 가시화(Visibility)라고도 한다.


그러니까 회사가, 동료들이, 나아가 많은 시민들이 내 성정체성을 지지해주는 이유는 이미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용기를 내 성정체성을 오픈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성소수자가 사회에 가시화되었고, 성소수자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한 명의 커밍아웃이 그 주변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의 인식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기하급수적이라는 단어에는 일말의 과장도 담겨있지 않다.) 성소수자가 회사를 위해 열일하는 직원일지도, 주요한 고객일지도 모르기에 기업들도 함부로 침묵할 수 없다. 성소수자 문제에 관련 없는 사람보다 관련 있는 사람들이 많아진 순간부터, 세계의 모든 사람과 관여되는 IT 기업들에게 성소수자 이슈에 대응해야 할 인센티브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그들의 기업 가치에 이퀄리티가 올라가게 되었으며, 6월이면 지지의 목소리를 내게끔 모종의 강제성이 부여되었다.


이렇게 세계를 혁신하는 IT기업들이 이퀄리티를 외치자 이것은 글로벌 트렌드로 자리 잡게 되었고,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트렌드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오히려 목소리를 내는 기업들이 쿨-하고 트렌디하게 보이는 것이고 침묵하는 기업들은 구시대적인 가치를 고집하며 멈춰 있는 기업으로 지목되는 것이다. 실제로도 유럽에서는 이 이퀄리티 지표가 기업의 브랜딩을 좌우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https://www.gaytravel.com/gay-events/gay-pride-event-calendar
올해의 전 세계 프라이드 일정 모음
매거진의 이전글 혐오 세력에 부치는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