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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Jul 07. 2024

가난 코스프레

흔히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가난을 내세운다. 어떤 이가 어릴적 먹던 음식을 보면 몸서리가 쳐진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순간, 몸서리가 쳐진다는 표현에 눈길이 멈췄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도 어려웠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기는 했다. 지나간 시절이 어려웠고 고생이 많았노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다. 과거의 어려움 속에서 지금의 나는 이만큼이나 되었다는 자부심이랄까? 아니면 자기 위로 같은 복합적인 심리가 작용한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어릴 적 어머니가 해준 음식이 맛이 없었거나, 지금에 몸서리가 쳐지는 기억이 없다. 바지랑대 꼭대기에 달아 놓아도 한여름의 열기로 쉬어버린 보리밥이었다. 다시 물로 헹구고 밀가루를 살짝 버무려 찐 밥에도 형제들의 숟가락은 바쁘기만 했다. 먹성이 좋아서였을까. 어머니의 손맛이 좋아서인가.

 

그 시절의 부족함을 메우려는 부모님의 피땀 어린 수고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 다양한 끼니를 만나게 했다. 봄이면 곡식을 한 줌 넣고 봄나물을 양껏 넣은 나물죽이 자주 식탁에 올랐다. 그 정치인 말대로 소금으로만 간을 한 부드러운 죽이었다. 쌀보다 좁쌀이 더 흔했던 시절, 조당수*도 자주 먹었다. 맛도 편안하지만, 노란 좁쌀 알갱이가 고요히 펴져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마음조차 편안해지는 음식이었다. 겨울이면 수시로 호박범벅을 쑤어 먹었고, 내 고향은 콩이 흔해서 국수를 만들 때도 콩가루를 적당히 섞어서 반죽을 밀었다. 밀가루가 더 귀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고향에서는 칼국수라 하지 않고 콩국수라고 했다. 이 또한 밥 대신 자주 식탁에 올랐다. 특히 콩죽은 그리운 음식이다. 콩가루를 끓여 쌀이나 보리를 넣는 것인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고, 가마솥 가득해서 며칠을 두고 먹기도 했다.

  

맛이 없었다기보다, 딱 하나 먹기가 고역이었던 음식이 있긴 했다. 어느 날 방에서 숙제하는데, 뒤란으로 뚫린 장지문을 사람이 휙 지나가는 듯이 느껴졌다. 실제로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 말을 들은 어머니께서는 영양이 부족해서 헛것이 보이는 것이라 하셨다. 그럴 때마다 ‘골메움’을 해야 한다며 ‘수꾸(수수) 풀떼기 죽’을 끓여 며칠을 그것만 먹게 했다. 지금은 너무나 귀한 수수로 죽처럼 끓인 음식이다. 골메움은 아마도 뼈(骨, 골)가 부실한 것을 메운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커다란 양푼에 담아 두면 되직하게 굳어 잘 떠지지도 않는다. 그 꾸덕꾸덕한 찰기를 숟가락에 담으려면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었다. 첫 입은 밍밍하나 오래 씹으면 구수했다. 며칠을 끼니마다 먹는 일은 고역이긴 했지만, 어머니가 해주는 보약과 같은 것이기에 투정 부리지 않고 먹은 기억이 있다.     

  

밥을 대신하는 이 모든 음식을 힘들게 만드신 어머니의 뜻은 오로지 쌀을 늘리려는 것이었다. 쌀을 아끼면 늘어나는 것이니까. 이런 음식들은 당연히 맛이 없어야만 했다. 보기도 싫어야 했고, 지금에 생각해도 진저리가 났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추억이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며 진정 맛있는 먹거리였다.

  

어느 부모님도 자식에게 더 귀한 음식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온 힘을 다하여도 그때의 형편이 수제비나 나물죽을 만들어 줄 수밖에 없었을 터인데 맛이 없다, 몸서리가 쳐진다고 하는 것은 제 부모를 욕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김삿갓이 자신의 조부를 역적이라고 한 것과 뭐가 다른가. 부모님이 들으면 얼마나 가슴 아파할 말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말이라는 생각은 왜 하지 못하는지. 자신의 어려웠던 시절을 구실로 동정과 지지를 구걸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코스프레라는 말이 유행어로 쓰인다. 영화나 만화의 주인공을‘흉내 내며 논다(costume play)’에서 만들어져 하나의 단어처럼 사용되고 있다. 여기에는 가식의 의미가 들어 있다.

  

어머니의 음식이 몸서리쳐진다면 그것 또한 거짓이 분명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라.

어머니의 음식이 어느 하나 맛이 없는 것이 있었던가.

어느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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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수 : 좁쌀을 물에 불린 다음 갈아서 묽게 쑨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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