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틀무렵 Aug 16. 2024

무수리‘만’ 되기로 결심했다

작년 이맘때,

어느 날 아내에게서 톡이 왔다. 쌀 살 때가 되었냐고 묻는다. 병원에 간 아내가 진료 대기 중에 늘 주문해 먹고 있는 농협마트에서 10% 할인 문자를 받은 모양이다. 10% 할인에 눈이 번쩍한 아내가 그것을 사두어야 하는지를 내게 묻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내게 왜 묻는 거지? 아내는 쌀독에 얼마만큼의 쌀이 남았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내가 밥 짓기를 너무 많이 한 걸까?     


그리고 일 년이 지난 며칠 전.

저녁상을 물리고 운동하러 간다며 채비하던 아내가 내게 묻는다. “나가는 길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릴까?” 설거지가 남은 상태이니 더 나올 쓰레기가 있을지를, 당연히 설거지할 사람에게 물어오는 것이다. 이건 또 왜? 왜 내게 묻는 거냐?


은퇴 삼 년에 밥 짓기와 설거지, 쓰레기 버리는 일은 완전히 나의 임무로 굳어져 가고 있다. 하긴 이런 것쯤은 내가 더 경력이 오래다. 대학 일 년부터 자취하며 스스로 끼니를 해결했다. 결혼하고는 밥 짓기를 아내에게 가르친 선생이니 말이다. 그래도 뭔가 이상하다. 지금이 주부로 제2의 業을 가지게 되는 전환期일까?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내는 은근하고 치열하게 부엌 공간을 지키고 있음을. 반찬이나 요리만큼은 자기 영역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아내는 나의 영역 침범에 두 가지 전략을 펼친다. 양념통의 위치를 수시로 바꾸는 전략이 그 하나이다. 이것은 제갈공명처럼 신출귀몰하여 나를 자주 혼란스럽게 만든다. 또 하나는 내가 어쩌다가 찌개라도 만들면 혹평을 쏟아 내는 것이 그 두 번째 전략이다. “괜찮네”라는 정도의 말을 들으면 최고의 찬사다. 그렇다면 딸내미가 늘 입맛을 다시며 엄지척했던 것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아내의 농성(籠城)은 견고하다.     


오늘 아침.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이 별로 없다. 틈이다. 견고한 아내의 城을 오랜만에 공략했다. 양념은 소금만 있으면 되니 기회다. 감자 두 알, 양파 한 개로 감자볶음을 했다. 감자를 채 썰어 물에 담가 전분을 뺀다. 올리브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알맞게 볶아 두었더니 부스스 일어나 프라이팬을 들여다보던 아내, “기름 범벅이네! 난 안 먹을래”라고 한다. 아! 김빠진다. 처음 보는 방어 전술에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안 먹을래’라는 전술에 대적할 만한 것이 마땅찮다. 두 끼에 걸쳐 혼자 꾸역꾸역 먹었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자기가 만든 반찬에는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맛있지를 묻는 게 버릇이다. 좀 짜니 싱거우니, 하는 눈곱만치의 꼬투리라도 잡으면 아내의 입에서는 공격이 들어온다. 싱거운 것은 건강을 위해서다. 짠 것은 내 입맛이 이상한 것이다. 반드시 아내가 흡족할 답을 해야 한다. 답은 정해져 있다. ‘맛있음’의 강요다. 희한하게도 강요된 맛도 결국에는 진짜 맛있어지는 경험을 날마다 한다.     


아내의 영역 지킴은 가끔 요리라고 할 만한 음식을 만들 때 확연히 자기 영역임을 선언한다. 그럴 때 나는 옆에 공손하고 어정쩡하게  시립(侍立) 해 있다가, 빈 그릇이 나오면 후다닥 씻고 음식물 부스러기가 나오면 얼른 봉지에 넣어 주변을 정리한다. 마치 미슐랭가이드 별 다섯 개짜리 식당의 셰프 밑에서 배우는 수습생 같은 모양새다. 요리를 먹고 나서는 마지막 일격을 가한다. 숟가락 놓자마자 아내는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TV를 보면서도 주방의 상황을 놓치지 않는다. 내가 뒷정리를 하고 얼추 설거지를 끝낼 때쯤이면 “커피 안 먹을래요?”를 외친다. ‘~래요?’는 권유가 아니다.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한다. 명령임을 왜 아니 모를까? 안 먹을래, 라고 하면 분위기가 싸해지는 것은 뻔하다. 항상 같은 모양새다. 주방을 사수하는 아내의 권위는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     


수십 년 가사 생활에 지친 주부는 누군가가 밥을 떡하니 차려 주기를 소망하면서도, 주방은 주부가 지키고자 하는 마지막 성역이다. 기어코 지켜야 할 의무를 스스로 지우는 묘한 공간이다.     


그래. 아내의 城을 존중해 주자. 밥 짓기 설거지 쓰레기 버리기 같은 허드렛일하는 무수리가 되자. 소소한 이런 사건(?)이, 혹여 후일에 내가 완전한 주부로의 전환記를 쓸 소재가 되면 안 될 일이다. 또한 나는 알고 있다. 남편을 부엌데기로 눌러앉게 하면 안 된다는 아내의 깊은 속마음을….     


나는 은퇴 삼 년 만에 무수리‘만’ 되기로 결심했다.          


작가의 이전글 피서(避暑), 피서(避棲)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