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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틀무렵 Feb 08. 2023

제사의 뜻을 되새기다

 아버지의 열 번째 기일(忌日)이 다가온다. 일터에서 돌아와 열병으로 누워있던 어린 나의 이마를 짚어 보던 아버지의 두꺼운 손과 바깥바람이 묻어온 서늘한 옷깃의 감촉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돌아가신 지 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 있다.     


 유교의 도리에서는 제사를 모시는 것(奉祭祀)과 손님을 맞는 일(接賓客)을 집안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정도이니 조상들의 제사를 대하는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그러나 설과 추석이 가까워지면 늘 차례상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제사와 차례 문제로 인해 집안 다툼이 생긴다거나, 심지어 이혼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도 오래다. 결국 작년에 성균관에서 표준 추석 차례상을 발표, 권고하기에 이르렀고 올해는 설 차례상의 권고안이 나왔다. 이어서 제사상의 권고안도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흔히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는 말들을 자주 한다. 특히 이 말은 제사나 명절차례를 모시는 일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듣는 말이다. 제사에 대해서 돌아가신 분이 드시냐부터 이 무슨 허례냐, 하는 푸념도 일견 이해가 된다. 나도 젊었을 때는 마찬가지였다. 추석날 성묘 가서 오래된 조상 묘소에 엎드려 절하면서 이게 무슨 소용이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직접 부모님 제사를 모시고 보니 새로운 생각이 많이 든다.     


 제사의 의미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의 은공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 첫 번째이다. 또 제사를 통해 형제와 친척이 모이고 음식을 준비하면서 부모님을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형제들과 전을 부치고 음식을 만들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좋아하셨는데, 저것은 어머니가 잘 만드셨는데 하다가 부모님 생각이 간절해지고 깊은 회상에 마음속이 뜨거워지곤 한다. 이렇게 형제간의 우애와 친지와의 만남을 이어지게 하는 목적과 의미가 있다.     


 이런 기본적인 의미에 더하여, 또 다른 의미는 제사를 통해 이웃에게 베푸는 것이다. 음식을 많이 준비하여 음복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 먹는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하나이다. 과거에는 일반 백성은 먹거리가 늘 아쉬운 터여서, 양반이나 부자가 제사를 빌려 많은 음식을 만들고 이를 나누어 먹는 의미도 크다는 것이다. 제사가 있으면 그날 밤은 동네 사람들이 잠들지 않고 음복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풍습이었다. 나도 늘 제대로 된 음식에 허기졌던 대학 자취 시절,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주인집에서 음복을 크게 한 상 차려 자취방으로 들여보내 준 일이, 맛있게 먹은 음식 중 손꼽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니 과연 그런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환경과 시절이 변했다. 제사의 몇 가지 의미 중, 베푼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는 이제 완전히 없어졌다. 게다가 형제들도 제사 참석이 여의치 않은 것이 요즘의 현실이니, 옛것을 그대로 고집하는 것은 우매한 일이다. 퇴계 선생도 예절과 풍습은 시절에 따른다 했으니, 이제 제사와 차례를 모시는 의례도 당연히 변해야 한다. 예절과 의례가 태고부터 지키라고 만들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퇴계 가문은 일 년에 하루, 주말에 날을 잡아 조상들의 제사를 한꺼번에 모신다고 한다. 그래야 멀리 있는 후손들이 많이 참석한다고 하니 충분히 참고할만한 사례로 생각된다.


 우리 문중도 옛 법에 따라 4대 봉사, 즉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봉행했다. 주손(胄孫)은 시제(時祭)를 제외하고도, 일 년에 최소 열 번의 제사와 차례를 모셔야 한다.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설, 추석….

현대의 생활에서는 무리한 일이다. 그래서 유교적 가풍이 강한 우리 집안도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모시기로 몇 년 전에 문중의 법도를 정했고, 작년부터 추석에는 합동 차례를 모시기로 했다. 마침 며칠 전 국학진흥원에서 조선 경국대전에서도 조부모까지만 제사를 지내게 되어 있다고 하니 잘한 결정이 된 듯하다.


 아버지가 지차(之次)라서 제사가 없었는데, 지금은 당연히 부모님 차례와 제사를 모셔야 한다. 지방과 축문도 못난 글씨나마 내 손으로 쓰고 어른들에게 배운 대로 정성을 다해 모시고 있지만, 차례는 간소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저번 설 차례는 간소하게 모셨다. 성균관에서 권고도 있었지만, 원래 법도에서도 기제사와 명절 차례는 달리해야 한다고 하는데, 똑같이 준비하여 모신 것은 이제까지 오히려 잘못 모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마음이 중요하지,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고만 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의례에는 격식이 있고, 절차와 품위가 있어야만 의식(儀式)에 공감이 된다. 즉, 공감은 마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형식으로도 공감을 표현해야 한다. 장례식에 화려한 옷을 입거나, 결혼식에 칙칙한 옷차림은 맞지 않는 것이다. 간소하게 하되 정갈하고 품위와 격식을 갖춘다면, 번거롭게만 생각하는 제사가 오히려 가족 간의 화목과 형제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며, 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부모님 또한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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